남들이 모두 광명(光明)으로 있을 때도 우리 집은 새집을 짓느라고 전깃불 공사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집을 새로 짓고도 몇 달 동안은 남포등을 켜고 살았다. 그즈음 남포의 바람막이인 호야를 깨끗이 닦는 일을 내가 도맡아서 했다.
예전에 그렇지 않았었는데 남의 집 전깃불 방에 있다가 집에 돌아와 보면 답답하고 침울한 느낌마저 들 때 내 손이 예외 없이 가는 데가 있는데 그게 바로 호야다.
호야 유리의 두께는 내가 알고 있든 모든 유리 물건 중에서 가장 얇다. 그런 물건인 데다, 그 생김새마저 아래위로 트였어도 위쪽은 좁아서 나 같은 작은 손이라야 들어가게 돼 있다.
부득불 내가 이 호야 닦는 일을 도맡게 됐다. 이참에, 남포의 갓도 함께 닦게 됐지만,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고 나서는 영 닦기가 싫어졌다.
자주 꾀를 부리는데, 이 꾀는 단순하고 천진하다. 호야 속에 내가 바라는 전구 모양의 그림 형태를 남기고 나머지만을 닦는 짓이다. 바느질하시든, 옷가지를 매만지시든, 이 그림자가 오히려 거슬리고 혼란스러워서 못 견디시는 어머니는 당연히 호야 닦은 나를 책망하시는데, 그런 날 밤은 아무 일도 되지 않는 어머니 일이다. 왜냐하면 호야를 빼면 그을음 때문에 안 되고, 더구나 호야를 뺄 수 없을 만치 뜨겁게 달았기 때문에 더욱 안 된다.
결국 압력은 아버지께 가해지고, 아버지는 밀려서 전기회사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농촌에 전기를 넣는다는 것은 아마 특혜 중의 특혜인 것이다. 1930년대의 사정으로 봐서는, 발전소가 멀지 않은 곳에 있고 변전소가 우리 동네에 있고, 그러니 외면할 수 없으리라는 짐작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파격적이었다.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한 집에 세 등 이상을 달 수 없다든지, 밤 열 시가 되면 전기를 가져간다든지, 전기용품을 살 수 없는 통제품목으로 했다든지, 계약 등수 외에 더 끌어 쓸 때의 벌금이라든지, 이런저런 규제도 많고 감시도 심했다. 온 마을이 함께 가설공사를 할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우리 집 홀로, 독 작업을 시키려니 아마도 아버지의 애간장도 어지간히 탔을 것이다.
곡절 끝에 드디어 전기를 드리게 됐다. 전쟁 준비 관계로 양곡의 통제와 공출이 혹독하여서 웬만한 집에서는 찹쌀을 심지도 못했으려니와 곡식은 모조리 땅을 파고 묻었다가 먹을 만치, 그것도 밤에 파내서 감추어 두었다.
이웃 간에도 내통할 수 없는 살벌한 때였다. 따라서 떡 같은 건 당시로서는 귀한 품목이다. 찹쌀이나 떡을 들키면 위법했다 해서 '주재소'로 불려 가기도 하는 때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 자기 손으로 피땀 흘려서 지은 곡식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천하의 학정인 시절, 그래도 인정은 우리네처럼 흙을 파먹고 사는 백성의 바닥엔 촉촉이 흐르고 있다.
떡 하는 날은 새벽 첫닭이 울기 시작하면 일이 시작되는데, 할머니의 빠지지 않는 참여로서 마치게 된다. 남들이 아침밥을 지을 무렵에는 모두가 잠잠히 늦잠을 청하는 것이다. 떡을 먹는 날은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일찍 아침 식사를 끝내야 하는 까닭에 내겐 그날은 조금 귀찮은 날이다.
다음 날 새벽 우리는 또 새벽잠이 깨야 했고 손님을 맞았다. 전기회사 사람인 것만 눈치챌 수 있었고 그 외의 어떤 말씀도 없이 묵묵히 잡수시는 그분은 ‘이 떡이 웬 떡이냐?’는 듯이 맛있게 잘 드시고 떠나셨다. 모름지기 새벽이니까 떡 보따리도 들렸을 것 같은데 알 길은 없다.
작은 정성이 그를 감동하게 했든지, 며칠 뒤 우리 집에도 전깃불이 켜졌고 남포의 호야도 내 손에서 떠났다.
아버지의 계획인 훗날의 영업, 그 영업용 전기를 들이고자 했던 데서는 좀 빗나갔지만, 나는 비로소 별천지에서 살게 됐다.
떡의 가치가 지금은 어떤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옛날의 그 전기회사 아저씨께 새삼스레 정감이 간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