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기억을 더듬다가 소여물 끓여 먹인 일이 생각났다. 이어지는 생각이 여물을 솥에서 ‘남박’으로 퍼서 ‘쇠구성’에 주던 일이 또렷하게 떠 오른다. 이 쇠 구성이 나와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것 같아서 따로 떼어 생각을 모아 보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한데 막상 꺼내 놓으려고 하니 ‘쇠구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저 그때의 감각으로 다른 집의 ‘구성(구유)’보다 훨씬 크다는 것과 그렇게 큰 것이 어떻게 우리 집에 있게 됐으며, 왜 남달리 컸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에 대해서 나름의 풀이를 늘어놓고, 이 풀이가 맞거나 틀리거나 나와는 상관없이 그때 존재했던 사실만은 확실하니 나머지 부분은 온전히 내 머릿속 것으로 여겨서 시비의 대상이 아니리라고 치니 마음이 가볍다.
‘쇠구성’은 우리 고장 사투리인 것을 집을 떠나서야 알았다. ‘소구유’는 남의 나라말 같아서 그 속에 여물이 담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의 어느 부분을 속박하는 장치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겐 ‘쇠구성’이라고 말함으로써 동리의 친근한 이웃이 다가오고 그들과 같이 숨이 쉬어질 듯한, 착각조차 이는 아주 정든 이름이다.
우리 집 ‘쇠구성’이 유달리 큰 것은 그만큼 묵은 집임을 알리고 그 큰 나무를 어떻게 마련했으며 다듬고 자귀로 파는 일을 몇 날을 보냈을까를 생각해 보고, 누가 그 일을 했는지도 모르는, 이런 것 모두 내 눈으로 본 그 ‘쇠구성’ 말고는 도무지 아는 게 없다.
무슨 나무인지 모르지만 몇백 년은 되었을 성싶고 그런 나무를 자를 수 있음은 자기 집의 소유이거나 아니라면 마을에서 원로들, 또는 공동의 여론이 수렴돼서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시대이건 만만치 않았을 것인데도 우리 집에 그 큰 ‘쇠구성’이 함지박과 더불어 남아 있음은 이즈음같이 사고팔기를 자유로이 하는 시대가 아닌 때임을 견주어서 보면, 꽤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집이었던 것 같다.
내 어릴 적 우리 집은 종가 쇄문(鎖門)답게, 할머니의 흔들리지 않은 발 디딤으로 인해서 바닥을 치고 깃을 펴서 창공으로 오르는 때였다.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다운 것이려니 생각하다가도 문득 할머니의 지난 나날을 생각하면 아리고 쓰리다. 우리 할머니의 겨울철 새벽이 이 ‘쇠구성’에서 시작되고 이 ‘쇠구성’과 함께 세월을 이었기 때문이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