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외통궤적 2008. 5. 20.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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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4.001103 정거장

기차가 건널목에 다다르기 전, 우리 동네에 들어오기 전의 철다리 목에서 꼭 우리 동네 어린이들에게 알리는 듯 기적소리를 요란하게 울린다. 예외 없이 울렸다.

 

우리는 이 소리를 신호로 하여 건널목 쪽으로 달려간다. 아직은 보이지 않으나 멀리서 달려오는 기차를 맞으려 나란히 늘어서서 기다린다. 가까워지는 '화통'을 바라보며 오늘의 기관사가 우리의 거수경례에 응답 할 것인지, 그냥 무심하게 지나칠지를 마음 설레며 그 기차를 맞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기관사들도 단조로운 들판이나 허허한 강변을 지나면서 그들의 고향과 그들의 가족을 떠올리며 그들의 가족들처럼 금방이라도 함께 숨 쉬며 어울릴 수 있는, 우리를 반긴다. 비록 우리가 그네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어도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향수를 불러내는, 작은 불씨 정도는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통에 달린 커다란 쇠 바퀴 틈에서는 하얀 김을 내 뿜어내어 우리의 접근을 미리 경계하며, 기관사는 우리가 늘어서서 반듯하게 거수경례를 올리는데 대해서 정중하고 무게 있는 손을 올려서, 역시 우리들의 방식을 따라 답한다. 이게 그 날의 우리 꼬마들의 기분을 즐겁게 하고 가슴을 꽉 채워주는 청량제 구실을 한다.

 

우리는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그 건널목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이 행사를 치르고서야 뭉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곤 했다. 이번에는 정거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렇게 크고 그렇게 긴 기차, 아침저녁으로 어김없이 두번 올라가고 내려가는 기차 속에 내가 아는, 진정으로 나를 안아줄 이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한, 그런 나날이다.

 

화물차가 철길을 따라 옮겨서 다른 철길로 들어서는 이치를 보고 깨닫는 것은 큰 재미중의 하나였다.

 

그때의 내 생각. 철길 두 가닥이 끝에 가서는 어떻게 마무리가 됐을까하는 단순하면서도 아무도 장담을 못하는 그런 철길이었다. 이런 철길을 볼 때마다 생각했는데, 훗날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했지만 그때의 내 고민만큼은 아닌 것같다. 마치 철길의 두 가닥 모양, 내 마음을 그와 합치시킬 수 없어서 답답했다. 능력이 있다면 그때 내 나이, 그 장소로 돌려서 설명했으면 속이 시원하게 될 것 같은데 그도 안 되고 내 표현능력도 한계이고, 가슴이 쪼여든한 때가 있었다.

 

철길은 내 어린 시절의 낭만이었고 풍선같이 부품 꿈의 철길이었다.

 

우리 동네 정거장에서 내리는 몇 안 되는 손님을 보는 것도 심심하지 않은 우리들의 구경거리다.

 

올 벤 논의 벼 포기에서 파란 새 순이 돋고, 방앗간 마당에 달구지들이 늘어서고, 나뭇잎도 길바닥을 굴러서 길가 후미진 곳에 쌓일 때쯤이면 내 마음은 설렌다. 올해도 오실 것 같은 고모, 내 마음이 정거장으로 가있다.

 

고모는 기별도 없고 기약도 없건만, 점심을 먹고 난 후에 내려가는 기차는 빠뜨리지 않고 대합실 지킴이가 되는, 내 이즈음의 오후 일과가 되었다. 작년에도 이맘때 오셨고 재작년에도 이맘때 오셨다. 올해도 오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모를 마중하려는 내 마음은 철석같이 변함이 없다.

 

고모가 오시는 것은 내가 동무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큰 이변이다. 일 년을 다 보내도 단 한 분이신 고모만이 우리 집을 찾을 뿐이다. 이것은 아버지 남매의 쓸쓸한 일생이시다.

 

고모가 오심으로서 내가 받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에 희망에 차서, 오늘도 오후의 정거장 마중길이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이 일을 아시면 더 마음이 아프실 것이 걱정스러워서, 몰래 홀로 나들이를 하는 것이다.

 

끈기 있게, 아니지 놀기 삼아서 개찰구를 지켜보는 내 눈앞에 내 꿈이 실현됐다.

 

고모는 쪼그리고 앉아서 나를 안아 주셨고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오래, 고모를 그리면서 고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앞장서서 날다시피 뛰어 가서 알렸다. 어머니가 달려 나와서 고모의 보따리를 받으셨고 고모는 나를 업어 주셨다. 얼마만의 호사인가.

 

 

감나무에 빨갛게 매달린 감이 빙빙 돌고 있었다. 고모는 재주가 많으셨나보다. 내 바지도 만들어 오시고 누비이불도 누벼 오시고 사탕도 사 오시고, 아무튼 내게 좋은 추억은 모두 고모의 것뿐이다.

 

어릴 때 본 고모는 그때 눈으로 그때 감정으로는 이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이 고모를 어떻게 해드려야 할 것인지 지금의 내가 너무나 무력하다. 이미 흘러갔다. 신이시여! 우리고모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외통-

 

어린이가 없는 곳에 천국은 없다.(스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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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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