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전이네

외통궤적 2008. 6. 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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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000828 음전이네

일가집으로만 알고 있는 음전이네는 어른들이 부르는 집가호이니 내가 불러서는 안 될 일이지만 마땅히 부를 호칭이 없어서 죄스럽고 욕됨을 무릅쓰고 아주머니 벌되는 분의 이름을 그냥 그 대로 부를 수 밖에 없다.

 

핏줄을 잇지 못한 '음전'이네 할머니는 남정네가 없어서 집안의 대 소사에 어울리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미안해하신다.

 

늘 겉도는 데릴사위는 우리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김 씨네 사람이고, 손자들도 김 씨이기 때문에 음전이네 할머니는 우리집안 일에 애써 멀리 하려고 몸 사리신다.

 

그러나 '음전'이와 '음전'이 언니는 어엿한 우리 일가이요 피붙이이니 '음전'이네 할머니는 앞으로 갈라 갈 새 성 과 이때까지 이어온 우리네 성을 잇는 이음새 할머니가 됐으니 두 성의 이음 길 복판에서 양팔이 따로 따로 당겨지는 아픔의 눈물을 먹으며 여생을, 아니 죽음을 기다린다.

 

그런 아픔을 덜어줄 양. 집안에서는 제집 일들을 제치고 '음전'이네, 할머니네 일을 우선한다.

 

데릴사위를 들이기 전에는 문중에서 집도 지어주고 밭도 얻어주고 땔나무도 대어 주었다.

 

할머니는 여자로서는 피울 수 없는 담배도 피우시며 나이 많은 시골 할머니들이 모르는 언문(諺文)도 익혀서 알고 계시다.

 

그리고 출가한 비구니처럼 먹칠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낸다. 손자도 아랑곳없고 집안도 외면하신다.

 

나들이는, 봉사가 아니어도 나갈 수 없고 귀머거리가 아니어도 귀를 열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속죄의 아픔으로 이어지고 은둔의 나날로 쌓아갔다.

 

심청전, 장화홍련전, 홍길동전, 춘향전, 옥루몽, 옥단춘, 등 이름도 모를 많은 책, 한결같게 헐고 때가 묻은 책이지만 할머니는 오직 게다가 혼신을 붓고 산다.

 

세로지기 문살의 여닫이 방문에 햇살이 들면 누런 뿔테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화로 불에 곰방대꼭지가 꽂힌다.

 

할머니의 양 볼이 움푹 패여 든다. 화로 불을 재와 함께 통째로 들어 마실 것처럼 빨아대면 담배 연기는 폭발순간의 발동기 가스처럼 튀어나오고 벽에는 예쁜 수묵화가 그려졌다가 사라진다. 길게 내 뿜는 연기는 다시금 한쪽 벽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천장에서 해후하여 구천으로 사라진다.

 

간밤의 한숨으로도 못다 한 한을 일시에 태워 버린다.

 

이 때쯤부터 쌓여있는 책이 펴지고 읽히는데, 듣는 이가 있건 없건 매양 구슬프고 구성지다.

 

겨울에는 삼을 삼을 일감을 가지고 찾아오는 이웃집이나 대소가 아낙들에게 눈물을 짜게 하고 코를 풀게 한다. 가지고 온 일감에서 손을 놓은 채로 한바탕 울음바다가 되도록 만들어 놓기도 하신다.

 

모두가 동병상련(同病相憐)이런가. 그럴 때면 '음전'이네 할머니는 더 읽을 수 없다.

 

밖으로 뛰어 나가신다. 자신의 비천함을 토막 내어 가루로 빻아서 하늘로 날려 보낼 양, 하늘을 향하여 깊고 깊은 한숨을 내뿜는다.

 

동백기름을 발라서 참빗으로 곱게 빗어 쪽진 머리가 아침 햇살을 받아서 반짝인다.

 

햇살은 '음전'이네 할머니가 한 손에 벗어 들은 안경알을 뚫고, 여닫이문을 비추면서 방안을 환하게 밝혔다.

 

새 삶, 아니 죽음의 길이 전개 되려나! /외통-

 

덕행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면 가치가 떨어진다.(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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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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