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

외통궤적 2008. 6. 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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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010215 방앗간

느닷없이 아버지를 딸려 보내시는 어머니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나의 걸음을 지켜보시는 어머니의 속이 또한 평안치는 않았으리라고 짐작은 간다.

 

아직 햇곡식이 여물라면 한 달이나 더 있어야 하는 음력 칠월의 그믐께 자다가 일어났으니 멍하다.

 

무엇 때문에 깨웠는지 영문을 모른 채 소달구지 뒤를 따라나서는 내 발걸음이 모르긴 해도 갈지 자 걸음을 했을 것이지만 내가 알 길은 없겠다.

 

소만큼 주인을 충실히 믿고 따르는 짐승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해본다.

 

초들자면 먼저, 소는 다른 짐승처럼 끙끙대거나 짖지 않으며 날뛰지 않아서 그렇고,그 엄한 식량통제 하에서도 우리 식구가  마음을 놓고  소와 함께 다니며 식량을 조달 할 수 있었으니 그렇다.

 

야행성이 아님에도 주인의 지시대로 잘도 움직였다. 소는 한겨울을 제외하고 늘 우리와 함께 일하고 함께 고통스런 날들을 잘 참았다.

 

소가 한 밤중에 달구지를 끌고 어딘가를 간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내가 그 이유를 모르고 한 평생을 살았다.

 

막상 회상이라는 의도적 치달음에서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가 풀려지니 내 마음도 후련하려니와 우리 집에서 가까운 방앗간이 많지만 굳이 길을 멀리 가서 방아 찧는 이유를 어렴풋이 풀어보게 되어 새삼 그 때의 정황이 눈에 선 하다.

 

흙이나 두엄을 실어 나를 때나 쓰는 '하꼬(나무상자)' 틀을 우차에 메운 것이 여느 때와 같지 않았다. 달구지 위에는 상자 틀의 높이와 가지런하게 나무 단이 올려 졌고 이 나뭇단을 밧줄로 얽어서 달구지 뒤에서 탕개로 바싹 틀어 조여 놓았다.

 

이것을 풀 때에 탕개 가 튕겨져서 다칠까 걱정될 정도로 나뭇단이 길이로 두 줄 움푹 들어가 있다.

 

드물게 서있는 가로등도 자정이 넘었으니 꺼졌고, 집집이 밝히든 전기 불도 등수대로 값을 내는 일반 집들이니 다 꺼졌다.

 

다만 ‘메도르(메터기)’ 계기를 달고 영업하는 집에서 간판 비추는 갓 달린 등이 하얀 자갈 깔린 신작로를 멀리 곧게 비춰서 동네 아래로 가는지 위로 가는지를 겨우 가늠하게 한다.

 

하늘에는 모래알 같이 많은 별이 달구지 바퀴의 쇠테에 부닥쳐서 부서지는 돌 조각 소리와 어울려 반짝거린다.

 

땅위의 모든 것은 그대로 스며자자들어서 흙 속으로 갈아 앉아 있다. 오직 한 마리 소와 이 소를 몰고 따르는 부자와 달가닥거리는 달구지가 있을 뿐이다.

 

간간이 멀리 떨어진 개울건너 동네에서 개짓는 소리가 별 속으로 흘러 들어갈 뿐이다.

 

어름 장 같은 고요를 뚫고 이제 막 ‘주재소’ 앞을 지났다.

 

‘주재소’ 앞의 길은 길바닥에 깔아놓은 자개 돌이 너무나 촘촘하여서 소리가 더욱 요란한 것에 마음 쓰이는 아버지다.

 

쇠 바퀴는 박힌 돌과 부디 치면서 불을 튀겼고 모퉁이를 돌아서 약간 언덕진 좁은 길을 달리듯이 굴러내려 갔다.

 

바퀴가 <짝 통>치는 소리를 내더니 달구지가 뒤뚱거렸고 , 순간, 갈나무 땔감다발에서 바스락 소리가 커지며 바퀴소리를 삼켜버렸다.

 

 

작은집 할아버지가 반기며 우리를 맞고, 갈나무 다발을 들어 치우고 속에 싣고 온 벼 가마를 두 분이 맞들어서 방앗간 안으로 옮겨가셨다.

 

서 너 번 이렇게 맞잡아 들인 벼 가마는 즉시 구석으로 감추어지고 방앗간 문은 굳게 닫혔다.

 

봇물을 이용하는 물레의 전형을 그대로 갖춘 이곳에서도 다른 곳이나 마찬가지로 할아버지의 손이 기다란 막대를 당김으로써 떨어지는 물소리가 달라지며 정미가 시작된다.

 

물레에 딸린 여러 부속이 움직이면서 방앗간 안에 있는 커다란 바퀴가 돌기 시작하였다.

 

폭포소리가 흐트러지면서 피대(皮帶)의 이음새가 바퀴를 지나갈 적마다 달가닥 달가닥 거렸다.

 

이 소리는 달구지바퀴가 신작로 지나가는 소리와 사뭇 달랐다. 달구지 바퀴의 땅 지나가는 소리는 그래도 숨 쉬는 소가 우리 곁에 있어서 설지 않고 포근했는데, 물레에 딸린 바퀴와 정미기에 붙어있는 바퀴를 이어 돌리는 피대가 바퀴를 지나가는 소리는 웬일인지 우리 곁을 떠나서 먼 곳에 있는, 남의 땅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움직임은 크고 느렸지만 나를 보는 눈길은 따뜻하여 포근했다.

 

우리 쌀을 한 밤중에 찧어주시는 할아버지의 속마음은 종가의 조카와 손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나서야 된다는 것이었으리라.

 

비밀을 보장받기 위해서 할아버지네 방앗간을 이용한 아버지의 양식 감추기가 ‘주재소’ 코밑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푹 꺼진 곳, 철길 밑에 자리한 이 방앗간은 숨겨진 곳, 외진 곳에 있지만 당초에는 물레를 돌려서 디딜방아로 벼를 찧던 것을 할아버지가 사들여 정미기 한대를 들여놓고 피대를 물레에 걸어서 돌리는, 당시엔 조금 앞선 방앗간이었지만 벼가 쌀이 되기 위해선 여러 번 정미기에 되잡아 넣어야 하는, 수고도 따라해야 했다

 

싣고 갔던 갈나무는 달구지에 얹힌 나무 상자 위에 실린 쌀가마 위에 다시 올려지고, 조임 막대의 틀림소리가 이번엔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아서 할아버지의 간을 조리게 했다.

 

 

이렇게 밤잠을 설쳐가며 종가의 조카와 손자를 보호하고 싶은 할아버지의 폭넓은 도량은 이곳 남쪽 땅에서도 계속되었고 우리들에게 또다시 값진 사랑의 교훈을 남기고 이승을 떠나셨다. /외통-

 

나는 인생의 격렬하고 잔인한 투쟁에서 나의 삶의 기쁨을 발견한다.

그리고 나의 기쁨은 무엇인가를 베우는 데서 생긴다.(A. 스트린드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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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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