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

외통궤적 2008. 6. 6. 12:40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1527.010218 원산

집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려고 하지는 않지만, 꼭 무엇인가 이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하는데, 알 수 없다. 참견하지 말고 네 할 일인 공부나 하라는, 판에 박은 말을 들을 것 같아서 아예 모르는 척하면서 몇 달의 일상이 지났다.

그러는 사이 돈을 마련하여서 나의 앞날을 어떻게든 밝게 해보시려는 낌새를 알 수 있었다.

나들이하실 때는 보통 당일치기로 하시지만 이번 나들이는 하룻밤을 묵고 내려오시는 아버지로서는 아주 중요한 일을 치르러 떠나신 것 같다.  

서울을 거쳐야 도청소재지인 춘천에 가지만 이 길은 꿈도 꿀 수 없는 먼 길이기에 아무도 춘천 나들이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기찻길이 이어져서 한 번만 갈아타면 원산에 가게 되는걸, 왜 돌아서 춘천에 가며 고생할 이유가 있겠는가!

아버지도 자연스레 다른 도(道)로 물건을 떼러 가신 것이다. 그러니까 생활권이 ‘함경남도 원산’에 달린 꼴이다.

동해안에 자리한 이곳 사람들은 뻔질나게 다니는 곳이 ‘원산’인데 이 ‘원산’을 나는 아직 지나쳐만 보았지 자세히 살필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이 원산이 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지만 한 가지,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서 애쓰신 행동반경에 들어있고 이곳에서 씨앗을 받아서, 이를 뿌리고 가꾸어서 돈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신 곳이니 원산은 내게서 잊히지 않는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누구나 자기와 어떤 관계이든지 조금은 얽혀있어야 그곳이 머리에 남으면서 관심 되고 또 찾게 될 것이리라. 그렇다. 그래서 내가 ‘원산’을 나와 관련지어 아직 잊지 못하고 있나 보다.

‘원산’은 한반도의 허리가 끊어질 뻔하다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지형을 하고 있다. 넓은 ‘안변평야’와 ‘철원평야’를 잇는 허리춤에 걸맞고 ‘갈마’ 반도가 길게 ‘원산’ 앞바다까지 내리 드리워져서, 그림으로도 아름답다.

문물이 순조롭게 발달하는 우리나라 동쪽 큰 도시 중에 ‘청진’과 함께 손꼽히는 항구도시다. 그러니 문물의 수입 창구 구실 또한 못지않게 이바지했음을 내가 커가면서 조금씩 알게 됐다.

거듭하지만, 역시 나와는 아무런 직접 상관이 없는 것인데도 내가 이토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버지의 ‘원산’ 나들이가 내가 부모 슬하에서 있던 짧은 기간에 일어났고, 내게 변화를 몰고 바람을 일으킨 도시이고 보니, 이렇게 들여다보고, 찾아보고 짐작해서 짚어보면서, 못내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내 배후의 도시이길 은연중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이불감과 솜을 어떻게 기차에 싣고 오셨는지는 모르나 우리 집 방 한쪽이 이 이불감과 솜으로 가득 찼다. 모르긴 해도 지고 들고 남는 것은 화물로 무치셨을 것이지만 내게 일러주실 리도 만무하고 나도 또한 외면한다.

이불감은 해방과 함께 터져 나온 감추어진 직포(織布)이니 그런대로 쓸 만했다. 아직 우리가 만져보지 못한 것들도 가득했다.

이로써 우리 집 여인숙 영업의 준비가 차근히 이루어졌고 이 덕으로 나도 진학을 할 수 있었으므로 ‘원산’과 이불, 아버지와 ‘원산’, 아버지와 이불이 번갈아 나를 일깨우는가 하면, 밤마다 명상하다 그대로 나를 잠재우곤 한다. /외통-



나이는 전적인 부패가 아니다. 그것은 익은 것이요, 부푸는 것이요, 시들어 껍데기를 터뜨리면 속에 새 생명이 있다. (G.맥도날드)

'외통궤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두1  (0) 2008.06.08
신주  (0) 2008.06.07
플라타너스  (0) 2008.06.06
방앗간  (2) 2008.06.05
단오날  (2) 2008.06.04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