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많았던 어린 시절, 집안의 이것저것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중 하나가 큰방 윗목 높은 데 있는 새까만 통이다. 한 벽에서 다른 벽까지 이어 매달린 선반 위에 놓인 채, 이제까지 꼼짝도 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다.
새까만 그 통은 눈도 귀도 입도 없다. 손잡이도 없다. ‘벙어리 저금통’ 같기도 한데 밑에는 네 개 모서리가 있고 그 모서리가 반 듯 한 걸로 봐서는 옹기그릇 같지는 않다.
윗면은 모나지 않은 부채 모양으로 둥글고 앞뒤가 가지런하다. 앞면이 넓고 옆면은 아기의 손 한 뼘쯤 되는 것인데, 무슨 통이고 무엇이 들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궁금해 죽겠다.
그런데 그곳이 내가 넘볼 수 없는 아주 높은 곳에 있으니, 안달이 더 난다. 올라가서 또렷이 볼 수도 없으니, 돌을 던져 깨뜨려 볼까 하기도하고 별난 생각이 다 난다.
그러기를 몇 해가 지났는지, 좀 철이 들 때 할머니의 말씀을 통해서 조상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더더욱 아리송한 의문을 더하는 말씀을 들었을 뿐이다.
조상님? 그러고 보니 명절 때마다 그 밑에다 상을 차리고 차례를 지냈던 곳임을 이제야 알만 은 한데, 이것이 궁금증을 한껏 부풀렸다.
저 속에 조상님이 계신다는 데 한 번도 내려오시지는 않으시니, 숨도 막히실 테고, 답답하기도 하실 텐데, 아니지 돌아가신 이는 숨을 못 쉬니까 죽었지, 또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뼈만 있단 말인가? 혹시 머리만? 해골이 숨어 있단 말인가?
꼬리를 무는 의문과 신비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저 새까만 통을 무슨 수로 그 속을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잘못하여 저 통이 내게 무서운 벌이라도 주지는 않을지, 점점 무서워지면서 보기조차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그날은 어른들이 모두 안 계신 날이었다.
자. 이 기회를 저 검은 통과 내가 맞붙어야 하는 기회로 심자.
선반 밑에 있는 궤 위에 올려있는 이불을 잡아당겨서 하나씩 하나씩 방바닥에 늘려 쌓고는 그 위를 딛고 간신히 궤 위에 올라갔다. 그래도 내 손은 미치지 않는다.
이번에는 베개를 디딤으로 올려놓고 그 위를 딛고서 선반을 잡고 허리를 폈다. 그래도 모자라서 깨금발을 하여 양손으로 선반을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이 검은 통을 우선은 자세하게 훑어본다. 아무리 봐도 ‘벙어리 먹통’이다.
도무지 손을 댈만한 틈새가 없다. 손을 댄 자국도 없으려니와 손잡이도 없다. 고리 이거나 달린 끈이거나 무엇이든 있어야 엄두를 낼 텐데, 더듬어도 없고 쓸어도 안 나타나고, 위를 봐도 먹통이요, 앞뒤 없이 매양 똑같다.
발도 아프고 팔도 아프다. 그래서 일차는 후퇴했다. 내려와 앉아서는 골똘히 생각한다.
무엇인가가 있긴 있는데 부셔서 볼 수도 없고,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 자리를 옮기면 무슨 소리가 나면서 나무랄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귀신이 울든지 웃든지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옳다. 옆으로 옮기면 조상이 무슨 반응을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낑낑대며 또 올라갔다. 이번에는 들어서 옮겨보려고 한다.
그렇게 조금만 옮겨놓으면 어른들이 알아차릴까? 달리 조상님이 어른들에게 알릴까?
이것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개구쟁이의 호기심 풀이 방법으로 남았을 뿐이다.
옮겨보자. 가슴이 두근두근하며 또 망설이게 된다. 그냥 조금 옮길 뿐인데 무슨 일이야 있을까? 나는 스스로 위로한다.
살며시 양옆에 손바닥을 대고 움켜 손가락에 힘을 주고 들었다.
앗, 이게 웬일인가! 이상한 감촉을 느끼는 순간 눈앞에 하얀 물체가 드러난다.
가슴이 조이고 팔에 힘이 빠진다.
다시, 이번에는 위로 좀 더 힘을 주고 올렸다.
거기엔 해골은 없었다. 다만 네모난 나무토막 위에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쓰인 종잇장이 세워져 있는, 종이 조상님 위패位牌였다.
누나에게 빌고 빌어서 현장 수습을 하고는 시치미를 오늘날까지 떼고 있다. 언
젠가는 그 위패 位牌 앞에 엎드려 조상님께 사죄하리라.
조상님. 그때 일을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칠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그 조상님 앞에는 설 수 없다. 아니 서지 못하고 있다. /외통-
고백된 과오는 그 사람의 새로운 미덕이 된다. (J.S.노울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