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형비행기

외통궤적 2008. 6. 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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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을 받으며 당숙과 함께 봇도랑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다.

그때 나는 아직 ‘코흘리게’였다.

남아 있는 한두 알의 이슬이 햇볕을 가려주길 애원하며 풀숲에 숨는듯하다. 봇도랑 둑을 두고 양쪽으로 펼쳐진 논은 온통 하얀 벼꽃을 피우고 새 옷을 갈아입어 나간다.

갓 팬 벼 이삭이 가지런히 펼쳐진 이쪽 논배미를 향해서 공격 함성을 지르는 참새 떼가 멀리 철둑길 언덕 싸리나무에 새까맣게 매달려 있다.

일찍 팬 논, 여느 논과 달리 벌써 연초록색으로 물들어서 새가 알아차리기도 좋을 성싶은, 이쪽 논이다.

그렇긴 해도, 정확하게 이쪽으로 몰려오는 한 무리의 참새 떼는 너무나 영악해 보인다.

당숙의 재빠른 방어는 깡통 치기다. 요란한 깡통 소리에 앉지 못하고 벼 포기에 닿을 듯 앉으려다가 그대로 공중 선회하면서 멀리 무리 지어 날아갔다.

연록의 논 바다는 회오리가 몰아친 듯, 파도처럼 출렁인다.

참새 떼는 그 공격을 미리 알고 쫓아야 한다. 한두 마리의 선두 공격조가 벼 이삭에 앉으면 무리는 사생을 불고(不顧)하고 모두 내려앉아 공격한다. 그때 새들을 쫓아냈다 하드래도 이미 쌀이 될 낱알의 물을 빨아 먹어서 쭉정이가 된다는, 새 떼의 무서움을 할머니께 들어 익히 알고 있는 나다.

새의 동향(動向)을 일찍 감지해야 한다.



오늘의 <레이다> 구실을 내가 해야 하고 그 결과는 훗날 벼 이삭이 빳빳이 섰느냐 깊숙이 고개 숙였느냐에 따라서 저절로 판명된다는 것을 알기에, 당숙은 내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당숙은 공부를 꽤 잘한단다. 오늘 가져온 비행기 만들 감들은 직접 자기 손으로 깎고 다듬어서 이제 조립 단계의 알맹이들만 가져왔다.

촛불을 켜서 조그마한 돌 위에 얹고 그 불 끝에다 이미 다듬어 만든 굵은 실만 한 대나무 가치 한 가운데를 불 위에 슬쩍슬쩍 대어서 조금씩 조금씩 휘어 내는 솜씨가 신묘하다.

불어져야 할 대가치가 포물선처럼 휘어져서, 네 개의 날개 끝을 하나같이 고르게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당숙의 솜씨가 절묘했다.



불 위의 대가치를 당숙의 얼굴과 번갈아 보는 나의 눈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

온 정신을 촛불 위에 모으고, 온 들판의 기운을 대나무 가치로 끌어들이듯, 당숙의 몸은 굳고 머리는 수정 같았으리라.

나는 그사이 몇 차례나 깡통을 두들겼다. 한들 당숙에게는 고요 그것이었을 것이다.

비행기는 완성됐다. 추진 프로펠러 몇 바퀴 돌려서 시험 비행시킨다.

성공이다.

봇도랑 둑 위의 길은 활주로가 되는데, 이 활주로가 천혜의 안전 활주로인 것은 비행기가 이탈 하드래도 주위가 풀밭이니 부서질 리 없고, 또한 떠다니다가 불시착 하드래도 부서질 리 없는, 바다보다 더 안전한, 벼가 팬 황금 들판이 비행기 양발 밑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대나무가 곧고 휘지 않고 부러지지 않는 나무인데도 연금사(鍊金師) 같은 당숙의 솜씨에, 나는 새로운 이치(理致)를 깨달았다.

내 손으로 만들어 보지 못하는 것 아쉽지만, 뜨고 나르는 모형 비행기를 보는 것만으로 내 마음을 달래야 했다.

당숙의 공부 자세가 내게 와 닿는 것이다.

이 비행기는 학교 숙제일 것이다.

해서 어린 조카에게 선뜻 넘겨주지 못하였으리라.

훗날 내가 새 떼를 몰아낸 품삯을 톡톡히 받으리라.



지금 새 떼를 막는다면 전자 감응 놀이 비행기를 그 들판에 준비했다가 새 떼가 날아오면 그 새 떼 속으로 장난감 비행기를 출격시켜서 대적해 봄직 한데, 그런 기회가 있을 것인지.

그때 당숙의 모형 비행기는 아직도 내 가슴 격납고(格納庫)에 그냥 그대로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외통-



어린 시절은 인류가 영속되게 하는 생명의 물질을 끝없이 재생산하는 과정의 한 단계이다.(B.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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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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