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머슴

외통궤적 2008. 6. 13.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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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001024 애머슴

세월이 약이라던가. 우리 집의 가난극복 장정(長征)이 아버지의 이마에 주름을 파고 어머니의 손마디가 옹이저서 굽고 할머니의 머리가 은백으로 변할 즈음에서야 그 고비를 넘겼다.

 

이제 남을 줄만하게 전답이 늘고 소도 여러 마리로 늘이게 되어서 해마다 쇠장을 한번은 봐야했다.

 

그런 아버지는 한가한 농한기가 아님에도 짬을 내시어 나들이를 하시지 않으시면 안 되는 때가 있었다.

 

장에서 돌아오시는 어느 날, 아버지는 내 형벌이나 됨직한 소년, 소에 딸린, 아주 늠름하게 잘 생긴 소년을 데려 오셨다.

 

소년의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말수 적고 심기가 깊어보였다. 그는 순하게 보였다. 나보다 훤칠하게 큰 키에 귀공자 같았다.

 

그 날부터 꼴지게는 그 형 같은 소년의 것이 되고 나는 아침저녁과 학교를 오갈 때마다 소의 등과 배 사이를 보는 습관마저 이 소년이 옴으로써 없어지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책보를 끼고 학교에 갈 무렵이면 애머슴은 집 앞을 흐르는 도랑에서 시선을 숫돌에 맞추고서 옆도 돌아보지 않는다. 얼굴도 들지 않았다.

 

당연히 학교엘 가야 할 시간이고 남들은 부모의 사랑으로 아침 해를 받아가며 등굣길에 오르는데 그는 눈도 감고 귀도 막고 오직 홀로 흐르는 도랑물에 앞날을 얘기한다.

 

미안하기도하고 죄스럽기도 하다. 아버지는 어찌하여 나와 같은 애들을 데려 왔을까? 비록 소 주인이 딸려 보낸 꼴머슴이래도, 설혹 그가 입을 맡길 떼가 없어서 따라 왔다 해도, 그가 내 눈앞에서 꼴지게를 지는 현장을 보는 것은 민망스럽다.

 

지금 내 등 뒤에 있는 그가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고개가 자꾸 뒤로 돌아간다.

 

며칠이 지난 후, 소에서 벗어난 나의 홀가분했던 기분은 사라지고 내 심기는 오히려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리고, 그가 있는 방 언저리를 맴돌면서도 말을 붙이지 못하고 헛돌기만 했다.

 

무슨 말을 끄집어내어도 무슨 위로를 해도 그에게는 한낱 바람소리에 다름 아니리라는 생각마저 들 때는 아예 내 머리를 흔들어서 그의 방 근처를 얼씬거리지도 않게 했다.

 

한 달을 못 채우고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아무도 모르게, 멀리, 나와 같은 자기또래의 아이가 없는 집으로 찾아갔을 것이다.

 

그것도 우리 마을을 멀리해서 갔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입치레 길마저 막고만, 그에게 또 다른 악연을 마련했을까?

 

밤도 좋고 낮도 좋다. 내 비록 어리긴 해도 우리 소의 등배를 곯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오후의 내 일과가 소의 몫이 되고 말았음을 기꺼워 한다.

 

그리고 형벌 되는 그 애 또한 어디에서나 제 몫을 다하기를 바란다.

 

지금쯤은 나처럼 옛이야기를 하면서 아름답게 칠해진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을 것이다. 나처럼. /외통-

옛날의 슬픔에 새 울음을 낭비하지 말라.(에우라피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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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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