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 태평양전쟁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 영화의 시골 순회 상영이 허락된 듯하다.
그때는 학교 교정에 말뚝을 박아 스크린을 설치하고 앞뒤에 적당히 앉아서 구경하는데도 구경거리가 워낙 없는 시골이다 보니 영화 상영은 여름 한 철의 시골 밤을 온통 북새통으로 만들고 마는, 밤의 작은 축제로 된다.
인근 동네에서는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나서서 우리 동네로 모여든다. 그러니 상영장이 되는 학교가 있는 우리 동네는 저녁노을이 지면서부터는 장날의 장터같이 북적댄다.
본 영화 상영 전에 틀어주는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서, 난 안달이다.
누나의 손을 잡고 일직부터 서둔다.
그러나 나와 다르게 누나는 느긋하다. 그도 그럴 것이 번번이 만화영화만 끝나면 운동장 바닥을 포근한 잠자리로 여기고 마냥 잠들어 있기가 예사인 나였기 때문이다.
보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영화는 끝났다.
동네 애들과 어른들이 우리 윗집 근처에 오면서부터 갑자기 큰 소리로 영화 속 주연 중심인물의 이름을 불러댔다. 무슨 영문인지를 알아야 하겠기에 나도 띄엄띄엄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며 줄거리를 이어 생각하게 됐다. 그 주인공 이름은 ‘영달’이다.
일직 부모를 잃고 홀 할머니 품에서 자라는 ‘영달’은 ‘월사금(月謝金)’을 마련하지 못해 결석을 자주 하면서도 학교엔 꼬박꼬박 다니는, 성실한 어린이다.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돌다가 수업을 마치는 시간에 동무들에게 듣고 베끼고 하면서, 수 없는 날을 보냈는데 담임선생이 등교하지 않는 어린이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서 가정방문을 했을 때 할머니가 이 일을 알게 됐다.
당분간은 ‘월사금(月謝金)’을 낼 수 없다는 하소연도 함께 들려주면서 영달을 찾았지만 이미 영달은 늘 하든, 할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이삭줍기에 나간 뒤였다.
다음날 영달은 할머니께 학교엘 간다며 나가고, 그 뒤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얼굴은 그 많은 주름이 겹치고 겹쳐서 골을 이루어 눈물을 받아냈다. ‘영달’은 조회를 운동장 한구석에서 혼자 마치고 체조도 구령에 맞추며 하고 있는데, 멀리 단 위에서 체조를 지도하든 선생님이 영달이 홀로 체조하는 곳으로 달려오고, 전 교생은 체조를 멈추고 선생님의 뛰어가시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영달’을 싸 안고 한참을 다독거리며, 담임선생님도 울고 ‘영달’도 울며 제자리로 모두 찾아갔다.
‘영달’의 ‘월사금’은 선생님의 사랑 어린 헌신으로 대납 되고, 교실의 학생들은 환호 속에 한참을 흥분했다.
‘영달’은 우리 윗집 아저씨고 영화 속의 영달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게 되는 꼴을 자제하는, 부담도 안고 자랐다. 이런 고통이 나로 하여 이 영화를 이제까지 기억하게 하는 촉진제(促進劑) 구실을 했고 지금도 그 연을 이어가고 있다.
해방을 맞은 우리 학교의 교장 사택에 소련군이 주둔하여 일본 사람들의 무장을 해제하면서 혼란기의 시설물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한 개 분대쯤 될 만한 인원에 말 두 필과 마차 한 대와 기관총 한 문과 따발총이 그들이 무장한 전부였다.
방학 때이긴 해도 우리 학교이니 당연히 애들이 우글거릴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을 준 해방의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이 생소한 일들을 흥미롭게 지켜보게 되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파란 눈으로는 제대로 보일 것 같지도 않아 걱정조차 되고, 혹시 청맹과니는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서양 사람이니까.
일본군의 부사관 휘하에서 청장년들을 훈련키 위해 학교에 마련한 몇 자루의 장총과 전교생을 훈련키 위해 마련해 두고 있는 많은 양의 목총, 총에 꽂는 총칼, 허리에 차는 긴 칼 등의 총기를 그들의 숙소인 교장 사택에 모아 놓고 있었다.
어느 날 장난기 어리게도, 그중 총에 꽂는 칼 하나를 들고나와서, 둘러선 우리에게 물어 댄다.
대강은 알겠는데 그중 아리송한, 칼 한 개 용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지, 그들의 총칼은 칼이 아니라 총 창이니 들고나온 검의 용처를 알 리가 없을 터이다.
수거한 칼의 종류가 여러 가지라서 혼란스럽긴 했겠다.
칼끝을 세워 들고 우리에게 보이고 ‘야뽄쓰키이?’ 란다.
둘러선 우리의 대답이 있을 리 없다.
이번에는 더 큰소리로 ‘야뽄쓰키이?’를 외고 자기 고개를 갸웃한다.
우리는 우리대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갸우뚱한다.
자기들끼리 몇 마디 주고받더니 한 병사가 안장도 없는 말을 끌어내어 훌쩍 올라타고 쏜살같이 사라졌다가 잠시 후엔 한 아저씨를 뒤에 태우고 달려왔다.
‘영달’이 아저씨다.
비로써 그들의 의문은 풀렸고 우리는 영달이 아저씨가 러시아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칼이 일본군 것이냐고 물었다는 것도 알았다.
이 무렵 우리는 무엇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나름대로 가치혼돈 시대에 살고 있었다.
초겨울의 한밤중에 아버지는 나를 깨워 행장을 차리게 하고 밖으로 함께 나섰다.
마당에 이미 준비된 소달구지에 나를 태우고는 메여 있는 소를 고삐로 한번 툭 치시고 걸어가신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우리 소는 즉시 움직이고, 달구지는 아무도 없는 한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가 기차 정거장 쪽으로 꺾어서 들어간다.
정거장 못 미쳐서는 길 양쪽 넓은 마당 뒤쪽에 큰 양곡 창고가 마주 보고 우뚝 버텨 있다.
우리 동네에서는 제일 큰집인데,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한길을 벗어나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서 오른쪽 창고에 닿았다.
거기에는 ‘루스키’병사 두 명과 ‘영달’이 아저씨가 있었고 그들은 한마디의 말도 없이 기계적으로 창고에 쌓인 콩 포대를 달구지에 싣고 아버지는 받아 쌓았다.
결국 두 집에서는 그해의 소 양식이 충분히 마련되었다.
‘영달’ 아저씨네는 소달구지가 없는 집인데도 우리 아버지를 설득해서 콩 반입을 성공시켰다.
병사들의 전리품 처분을 도운 나는 그 증인으로 마땅하고, 그래서 아버지는 후일을 위해서 나를 데려가셨는지도 모른다.
이웃사촌의 정을 외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인정 어린 단면이기도 하지만 어린 나로서는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홀로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짐을 졌다.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를 염려하는 아버지의 판단은, ‘영달’이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가 거절한다면 다른 집과 협력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달’이 아저씨는 이러나, 저러나 성공이지만 아버지는 어려운 입을 뗀 ‘영달’이 아저씨에게 깊은 골을 파고, 이웃의 사촌은 남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또 ‘영달’이 아저씨가 다른 이웃이 꺼려서 이 일을 무시했다면 점령군의 호의를 무시하는 중죄(?)를 짓게 될지를 누가 알 것인가!
모든 게 유동적인 그 시절에는 그랬다.
활동사진 속의 ‘영달’과 ‘루스키’ 통역으로서의 ‘영달’이 마냥 겹치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 후 그들의 아들딸들이 이 땅, 자유 천지를 활보했다. ‘영달’이 아저씨 딸은 얼마 전에 자기 딸을 나에게 소개하면서 지난날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 ‘영달’ 아저씨의 아들딸은 이미 세상을 떴고, 나만 이렇게 독백한다. /외통-
현명하고 선하고 공정하게 살지 않고서는
즐겁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에피쿠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