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 우리 아버지가 머리 깎는 기계 좀 달래요. 제 머리 깎을 거예요’
씨도 토도 빠지거나 보탬 없이, 아버지가 일러주신 대로다. 갈퀴로 훑어낸 벼를 멍석에 널고 계신 큰 할머니 귀에 들릴까말까 꺼지는 소리로 외워댄다. 초가을 볕이 따갑다. 몇 번이고 되풀이 외웠을 때, 그제야 들으셨는지, 멍석 에서 저만치 떨어져 오른손을 머리 뒤에 대고 게면 적게 서있는 '윤' 에게 할머니는 흰 이를 드러내신다. ‘너 머리 깎게?’ 곱게 빗어 쪽지은 가르마가 반듯하다, 못해 은수저 한 짝을 올려놓은 듯, 반백 머리카락에 수직으로 빛난다. 흔한 할머니들처럼 맨 발도 아니고 더구나 오이씨 같은 버선발로 멍석 위를 오리걸음 하시다가 윤을 처다 보시는 할머니 이마의 잔주름은 머리카락만큼이나 곱살하다. 뒤 쪽진 은비녀와 너무나 어울렸다. ‘큰아버지가 일 나갔으니까 오늘은 못 깎아주고 그냥 기계만 가져가서 아버지한테 깎아 달래라?!’ 멍석밖에 벗어 놓으신 흰 고무신이 가지런하게 부엌문을 향했고 깔아놓은 멍석은 자로 잰 듯 초가지붕 처마자락과 나란했다. 큰 할머니의 한 손에는 머리기계(버리캉)가 있고 한 손에는 밤톨이 담긴 손바구니가 들려있었다. ‘우리 집에는 왜 머리 깎는 기계가 없을까?’ 생각하는 '윤'에 게 큰할머니가 다가왔다. 바위처럼 땅위에 누워 있던 '윤' 의 그림자가 몹시 흔들리고,'윤' 은 뛰었다. '윤' 이 모퉁이를 돌아가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할머니의 그림자가 윤의 그림자를 대신하여 바위 돌이 되었다. 한참동안 무겁게 드리워 있었다. 머리 깎는 기계에는 내 작은 염원이 담겨 있었다. /외통- 보다 강한 유혹, 보다 약한 욕망이 사람을 괴물로도 만들고, 사람을 성자로도 만든다.(W. 러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