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사촌

외통궤적 2008. 6. 21. 13:08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1599.010129 외사촌

누가 뭐래도 친인척은 변하지 않는 인륜의 한 올이니 바꿀 수 없고, 소스라칠 지난 일이라고 하여 외면할 수 없다.

 

굵고 느슨하게 꼬아진 방안 전등전깃줄이 바래서 충충하다. 겉에 입힌 섬유질은 실오라기가 밀려서 속 줄이 보이고 손때가 얼마나 묻었는지 전깃불에 반질거리기까지 한다.

 

줄은 드리워서 부엌과 방사이의 벽 위에 붓 박아 놓은, 펼쳐진 책 크기만 한 유리 봉창 위에 매달려서 솥에서 올라와 서리는 김을 뚫고 부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방에서 내다뵈는 부엌은 여전히 어둡고 멀다.

 

이만하면 해방당시의 시골로는 개명된 별천지인데도 나는 늘 부끄럽고 창피했다. 여느 영업집은 부엌에도 등을 달았기에 그게 또 신기하고 부러웠다. 그런데다 낯선 이가 와 있으니 더 창피하다.

 

전등 밑에는 건장한 아저씨 한 분이 이제 막 들어온 나를 반겨 정색하며 머리를 쓰다듬고, 멋쩍은 나는 그냥 ‘어머이!’를 외쳤다.

 

들어오신 어머니께서는 내겐 아무 말씀이 없으시고 그 아저씨께만 조용히 나를 일러주고는 나가시면서 내게는 오른팔을 크게 한번 내저음으로서 입을 닥치고 있으라는, 늘 하시는 손짓말로 나와 통하고 말았다.

 

식구들은 달그락거리는 숟가락 소리만 내고 어느 누구도 입을 떼지 않으니 나는 이따금씩 천장만 쳐다보고 몇 번이고 반찬그릇에 헛수저질을 할 뿐이다. 수저를 얼른 놓고 뛰쳐나갔다.

 

별 하나 없는 깜깜한 밤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만 스산하다. 이따금씩 개짓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서 들려올 뿐이다.

 

아직 추석이 보름이나 남았으니 밖은 칠흑같이 어둡다. 집집이 창을 뚫고 나온 불빛이 희미하게나마 길을 트지만 머지않아서 천지는 암흑으로 변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형은 간데온데없이 사라졌다. 아무도 형에 대해서 알려주는 이는 없다.

 

없으니 가셨나보다고 생각할 뿐이다. 눈치만 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어머니가 일러주신다. 배를 얻어 타고 '이남'으로 내려갔노라고, 돌아온 배 소식을 들으시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

 

형은 북한에서는 살 수 없는 친일파, 주경야독의 입지전적 야망을 이루어 일본경찰이 됐었으니 그 하늘아래 발붙일 곳이 어디에 있었겠는지. 지극히 위축되어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적 말살의 그림자를 간신히 피해서 어느 한 날 저녁의 나와의 면접으로 피차의 연이 잠시 확인 됐을 뿐이다. 그 용모나 성품을 알 길은 막연하다.

 

나중에라도 후손을 만난다면 이로서 다행한 일이라고 할밖에 없다.

 

어린 나의 입을 못 믿는 아버지의 함구령은 나를 며칠 동안이나 궁금하게 했지만 형의 남행성공은 훗날 내가 이 땅위에 발을 딛는데 심리적으로 크나큰 버팀목 구실을 했다.

 

비록 내 아직 외사촌형의 소식을 못 듣고 있지만 형은 내 의식 속에서나마 이 땅위에서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나를 맞아들이고 있다. 포용의 양팔을 폈던 유일한 혈육, 그 존재 였다.

 

‘나도, 남쪽 어딘가에 외사촌이 있다’는 용기를 얻었고 이로해서 망설임 없이 택했다.

 

그리고 지금, 아무런 후회도 없다. 다만, 남북을 통틀어 내 모든 혈육의 생사를 알고 싶을 뿐이다. /외통-



'외통궤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술쎄트  (0) 2008.06.21
입학 하는 날  (0) 2008.06.21
통조림1  (0) 2008.06.19
염원  (0) 2008.06.17
발구와 달구지  (0) 2008.06.15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