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하는 날이 됐다.
입학 전 면접에서는 부모의 이름과 주소나 식구들의 이름을 물어본 다음 대답하는 내용을 듣는, 지극히 간단한 것인데도 수줍어 응답 못 하는 애들이 있었나 보다. 혹시나 해서인지 누나와 아버지는 번갈아서 연습을 시키시느라 애쓰셨다.
지금이야 손바닥만 한 운동장으로 보이겠지만 그때 내가 본 운동장은 드넓었다.
운동장 한쪽 끝에서 맞은편 끝을 보면 아득히 멀게 보였고 한참을 걸어가야 닿을 듯했다.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첫날은 부형들과 함께 법석이는 하루였다.
그날의 기억이 지금까지 남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인 듯하다.
아마 작은 집 형이 내게 각별한 관심이 있어서 나를 인솔했는지 모른다. 이곳저곳을 손잡고 다니면서 가르쳐주었다.
그러다가 운동장 한쪽 구석에 놓인 미끄럼틀로 데려가서 내 또래의 어린이들 틈에 집어넣고 멀찌감치 물러서서 내 태도를 지켜보았나 보다. 줄을 선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차례를 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밀치고 제치고 다툼으로 먼저 사다리를 오르려 매달리는 틈에 끼어 함께 비비고 제치고 올라감으로써 내 차례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틈바구니에 끼어 아귀다툼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체념하고 뚝 떨어져 서 있는 나를 보다 못한 형이 한 번이라도 태워줄 양으로 내게 다가와서는 내 손을 잡고 많은 아이를 제치고 미끄럼틀 위로 올려보내 놓고 가버렸다. 시작종이 울려서다.
왜 다른 애들을 밀치고 제치질 못했을까. 이 간단한 일이 나를, 스스로인 나로 만드는 시금석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본성의 싹은 이미 집안에서 틔었다지만 이 일은 이후 공동생활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개성이 굳어졌다.
만약 그 놀이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의식교육까지를 같이 교육목적으로 포함하여 가르쳤다면 개개인의 품성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 실 그 놀이를 통해서 아동들의 발달 과정을 알아볼 의향이었다고 말한다면, 달리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내게는 그 일이 바로 고쳐져야 할 교육의 표적이 아니었겠나 싶은데, 이후 내게 이것을 비추어서 가르쳐준 선생이나 선배는 없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데도 곱씹어 보고 싶은 대목이다.
그렇다. 만약, 나에게 ‘아귀다툼’을 해서라도 타야 한다고 가르쳤다면 아마도 난 사생을 결단할 듯 다른 애들을 제쳤을 것이다.
내가 나를 잘 알지만, 그렇게 하고도 남을 내 성정이기 때문이다.
많이 참고 견디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때로, 결심하면 통제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 그렇다.
지금도 형님을 보면 그 일을 떠올리곤 하는데 모름지기 형님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기억, 그것은 각자의 심리적 반응에 따른 마음에 새기는 조각의 깊이와 크기와 형태에 따라서 다르고, 더욱이 세월의 풍화에 문드러져 패였든 조각 자국이 지워지고, 마침내 그런 일이 있었던 것조차 모르기도 하고, 점점 깊이 패서 그 모양이 뚜렷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마 마음에 새기는 마음 판이 얼마만큼 자극받고 얼마만큼 순수했느냐에 따라 새기는 깊이가 깊어져서 세월이 가도 문드러지지 않는, 그런 새김이 되어서 기억되는 것일 테다.
그 일이 일 학년 생활을 온통 털어서 유달리 기억된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이 컸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찮은 일이 맴돌고 있는 이유는 내가 바로 그 점을 내 생의 좌표로 늘 기억하며 그때마다 옳게 판단코자 하는 노력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되새기고, 되새기기를 반복해서 오늘까지 기억하는지 모를 일이다.
어디를 가나 어린이 놀이터가 있지만, 그 옛날처럼 붐비는 곳을 보지 못한다. 단순한 생각으로 말한다면 어린이들의 사회적응 훈련이 잘된 것으로 치부하고 싶다.
잘못 비추어 생각한다면 옷 빨아대기 귀찮은 부모들의 억제 탓으로 여겨서 모독이 될까?
하여튼 내 어릴 적의 미끄럼틀은 쟁취(爭取)의 장이었다.
부러울 따름이다.
지금도 난 줄서기를 즐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