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의 기억은 모두 먹을 것과 관련지어져서 생각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잊히기 전에 나타내야 될 것 같아서 안간힘을 드려서 짜 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책상마다 놓인 단조로운 열매의 청초한 그림자를 책상 위에 비치면서 고사리 손을 맞았다.
손바닥만 한 흰 종이 위에 뽕오디 세 개와 개량 버찌 세 개가 놓인 것이 전부인데 왜 그것이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무엇을 내놓고 어떻게 해주어야 이 새싹들을 붙들어 앉히고 눌러 있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 흔적을 이 여섯 알의 열매가 말해 준다.
요즈음같이 과자를 살 수 있는 때도 아니고, 치마 바람이 드세서 '기부'나 '희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농촌 '국민(초등)학교'의 작은 정성이 이렇게까지 이르도록 농익은 작은 열매다.
이 열매는 오로지 새로 들어온 어린이들이 육 년동안 보고 만지고 가꾸고 다듬어야 할 교정과 학교 울안의 텃밭에서 따온 것들이다.
정성들여 다듬어서 더도 덜도 아닌 여섯 알씩 얹어놓은 선생님의 마음이 알알이 담긴 사랑의 열매다.
얼마나 가슴 뿌듯한 정경인가! 내 평생 이렇게 값지면서 소박한 과일 접시는 보지 못했다.
아니다.
극적으로 구성하려 해도 이렇게 백지위에 조화롭게 구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빨갛게 익은 개량 버찌는 세쌍둥이 모양으로 꼭지 끝이 한곳에 붙어 있어 내 엄지와 검지에 매달려 춤추듯 대롱거리는 것, 상상만 해도 마음은 천국의 길목에 가 닿은 듯 가볍고 흐뭇하다.
꼭지의 길이가 여느 열매나 과일의 꼭지처럼 짧지 않다. 몸통의 열 배 길이나 되도록 여유로워 한가롭기까지 하여 학의 목같이, 기린의 목같이 길어서 불안하기조차 할 정도로 우아한 꼭지다.
열매를 먹기엔 꼭지가 아까울 만치 마음을 사로잡는 개량 버찌는 그 후로 먹어보지를 못했다.
몇 번을 입에 넣었다 다시보고 다시 볼 정도로, 먹기 아까운 ‘사꾸람보(さくらんぼ )’였다.
햇빛이 스며들어 새까맣게 빛나면서 수많은 씨앗을 품은 졸개를 거느린 뽕 오디는 한 알의 오디가 터질 듯 팽팽하다.
가만히 놓아두면 기어서 달아날 듯하다. 오물거리며 다가오는 뽕 오디를 보노라면 등이 간지러울 지경으로 탐스럽다.
꼭지가 길지 않아서 입에 넣기는 좋은데, 입에 들어가면 혀 바닥 위를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살아서 움직이는 열매다.
개량 버찌의 맛은 시고 달면서 껍질이 입에 씹히지만 향긋한 맛이 새롭다. 뽕 오지의 맛은 달고 연한 것이 다르고 껍질은 없지만 속에 박힌 꼭지의 줄기가 입에 남아서 것 돈다. 그러나 이것들로 장난을 오래 치기엔 너무나 입이 고통스러웠다.
한 입에 털어 넣는 애, 따로따로 맛보는 애, 그 작은 것도 베어 먹는 애, 별별 애들이 다 있었을 것이다.
하하. 보지 못한 것은 내 탓이 아니고 내 입 탓이니까 그 일로 속상할 일은 못된다.
뽕 오디는 우리나라의 것 우리의 얼이고, 개량 버찌는 일본의 것 ‘야마도다마시ヤマトタマシ ’인 것 같아서, 선생님으로부터 처음 받은 세알씩의 오디와 버찌에 대하여 육십 년이 지난 지금 생해보는 묘한 느낌, 합성된 작품인 것 같아서, 이런 것들 또한 우연인지 필연인지 상념에 사로잡힌다.
잊을 수 없는 여섯 알의 열매였다.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