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가르치는 시간을 일주일에 한 시간씩 두어서 우리 민족혼을 달래고 있었던 때였다.
‘창씨개명’ 정책도 완강히 펴기 전이니까 조금은 유화정책을 유지하던 때였나 보다.
지금 같으면 유치원이다, 과외다 법석일 터이지만 그때 농촌 사정은 머슴살이 안 시키는 것만도 행운으로 여겨야 했던 시절이다.
시골 학교는 새로운 문물의 샘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이 세상 모두인 양 학교생활에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는 우리들의 낙원이었다.
민족혼 말살 정책으로 우리를 옥죄기 시작하면서 조선어를 일주일에 열 시간도 가르치지 않았는데, 그런 시간도 어느 날부터 조선어 선생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후 우리의 책보 속에 ‘조선어’ 책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책이 되면서부터 조선어책은 선반 위에 얹히고 말았다.
학기 초에 새 책을 받으면서 헌책을 걷을 때 어김없이 조선어책을 걷어갔으니 워낙 둔한 내가 그 속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생각나는 것은 첫, 조선어 시간에 가르치든 선생님의 용모와 그 시간에 배운 내용의 지극히 일부만이 생각날 뿐이다.
첫 쪽에 여러 개의 칸과 줄을 내어 사이사이에 그림을 넣고 옆에 그 이름을 곁들었다. 양면에 서른 개 정도는 됨직한 그림들이 빽빽이 들어간 쪽이 여러 쪽이 있었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맨 첫 쪽에 있는 ‘북’ 그림을 읽는 선생님의 입 모양이 이 선생님과 함께 조선어를 상기시키는 대목이고, 아직 잊지 못하는 스승 중의 한 분이다.
여드름이 덕지덕지 나고 늙수그레한 둥근 얼굴이 검은 턱수염과 어울렸다. 그런 얼굴의 볼에다 바람을 올챙이배같이 불려서, 바람 넣은 복어같이 불룩하게 튀어 부풀렸다가 터지는 모양을 하며 내는, 둔탁하고 폭발하는 소리로 ‘북’ 하며 온 교실 안을 입과 콧바람으로 덮어씌웠다.
이런 가르침이 나로 하여 ‘조선어책’을 통해서 조선어도 가르쳤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였고, 또 단 한마디, 책을 통해서 배운 외마디 우리말 ‘북’이었다.
그 많은 그림 중에 하필 ‘북’만을 잊지 않고 기억할까? 나 스스로 의문이지만 선생님의 특이한 발성 입 모양으로 그나마 우리 글 외마디와 선생님을 기억하는 것 같다.
비록 짧은 한두 시간이었는데도 잊혀버린 배움의 많은 시간을 앞질러서 맨 위에 자리 잡혀 있는 것은 ‘조선어’ 시간이 없어진 것이 배움의 걸음마를 내딛는 첫발에 채인 돌부리에서 받은 상처이기 때문에, 그 상처가 크고 깊어서 낳지 않고 오늘에 이른 것으로 여겨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 ‘조선어’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음을 뒤늦게 들었다. 새로 들인 머슴의 이름을 알아야 집안일을 시킬 터인데, 무식쟁이 주인이 성씨를 물으니 새 머슴이 대답하기를 ‘배가올시다’라고 대답하니 주인은 나름대로 공책에다 썼다.
다음날, 새벽 마당을 쓰는 머슴을 주인이 대청에서 내려다보며 오늘의 할 일을 이르려고 불렀다.
‘공 서방!’
지척에 있는데도 대답이 없다.
이번에는 큰소리로
‘공 서방 자네 왜 대답을 안 하나!’
하고 다그쳤다.
주인이 화내는 줄 알아차린 새 머슴이 그제야 돌아보며
‘저 말입니까?’
고 물으니, 주인이 그렇다고 하며
‘자네 귀머거리인가?’
고 되물었다.
‘아니올시다!?’
고 새 머슴이 대답했다.
‘그러면 내가 부른
“공 서방” 소리에 왜 대답하지 않나!’며 주인이 야단친다.
‘주인님 제 성은 배가올시다’
라고 새 머슴이 대답하자 주인은
‘고약한 놈 벌써 주인을 속이려 드는 놈’
이라며 적어 놓은 공책을 높이 들어 호통을 치면서 여기 이렇게 적어 놓았는데도 저놈이 날 속이려 든다며 공책을 펼쳐 보였다.
‘여기 이렇게 써 놓았는데도 딴소리냐?’
며 더욱더 호통이다.
‘주인님 저는 배가올시다’
머슴이 황망히 아뢰자,
’옳지 꼭지를 안 그렸구나.’
주인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이 조선어책 이야기는 한국전쟁 후 이 땅에서 만난 재종 형님께서 알려주시며, 지난 어린 시절을 함께 거닐었다.
무식에 관한 해학적 풍자로 문맹을 없애려는 가르침이다.
이후, 이런 재미있는 우화는 들어볼 수가 없었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