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맺는 나무 중에 꽤 큰 나무 축에 드는 것이 ‘플라타너스’ 같고 잎사귀도 아주까리 잎같이 넓은 것이 시원스럽다.
이 나무의 이름이 호(胡)든지 왜(倭)라는, 갓을 쓰지 않은 것으로 봐서 멀리 서양에서 들어온 나무인 것 같은데 ‘프’ 자를 뒤집어써서 프랑스에서 왔는지는 몰라도 서양 사람답게 무척 크고 장대해서, 보기에 넉넉하다.
내가 태어난 마을에 '면소'가 있는데, '면소(사무소)'의 둘레를 이 나무로 경계하여 울을 쳤다. 모름지기 그 무렵의 '면소'는 어딜 가던지 이 나무가 바로 '면소'임을 알릴 만큼 면소와 ‘프라다 나스’ 나무가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하늘을 찌를 듯, 세상을 가릴 듯, 마당을 내리덮은 이 나무를 쳐다보던 내가 홀딱 반한 것은 드문드문 달린 탁구공 같은 열매였다.
아버지를 따라서 면소에 갔을 때의 일이니까 아득한 옛날인데, 이 열매를 얻고자 한없이 기다린 때가 엊그제 같다.
곧 떨어질 것 같이 드리운 열매를 쳐다보려니 하늘이 돌고 세상도 돌았다. 간간이 비치는 푸른 하늘에 섞인 흰 구름은 맡아놓은 내 열매를 싫고 둥실둥실 떠가는 것이다.
나는 그 열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예 땅 위에 누어 버렸다. 열매를 구름에 빼앗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수고로 열매를 손에 넣고 나서야 일어날 수가 있었으니.
며칠 동안의 놀이는 이 열매의 실 같은 살결이 문드러지면서 끝장이 났지만, 그 열매로 인한 추억은 ‘플라타너스’의 이파리와 함께 일생을 풍요롭게 한다.
우리의 지각은 무한하여서 좋다. 이 나무로 인한 나의 삶이 푸르고 높고 우거지길 평생 바랐지만, 나무가 안겨준 인상을 그대로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플라타너스’가 내 고향 '면소'의 것처럼 제 나름으로 한껏 커가는 것이 이 나무의 소원일진대, 우리가 보는 가로수로 심어진 ‘플라타너스’는 허리를 잘려서 안쓰럽다. ‘무스’ 바른 머슴애 머리처럼 새순만 무성하게 자랐고 열매는 고사하고 말뚝이 돼서, 나무라기보다는 키 큰 풀같이 돼서, 내 마음을 쪼그라들게 한다.
농작물에 그늘 지운다고 베고, 전선을 떠받친다고 베고, 가로수라면서도 가로등 가린다고 베고, 이정표 가린다고 베고, 가로수로는 전혀 적합지 않은 나무를 가로에다 심고 나무만 학대한다.
인간들아! 이 업보를 어떻게 감당하려 하느냐. 그럴라치면 앵두나무나 구기자를 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플라타너스’는 여름엔 녹음이 필요하고 겨울엔 햇빛이 필요한 곳에 심어서 천연의 기를 살려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나무로부터 기운을 받아 무한 성장하고 우리의 기백을 키워 내야 한다. /외통-
아침이 그날을 알려주듯, 어린 시절은 성인을 알려준다. (밀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