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공부

외통인생 2008. 6. 2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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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001201 밤공부

나는 초등학교 전 과정에 거쳐서 교실 밖에서 책 보따리를 끌러 본적이 그리 많지 않은 기억이다.

집에 오면 책 보따리를 방 윗목으로 밀어 던지고 밖으로 튀어 나가기를 일과의 마디로 하면서, 다음날 학교에 갈 때라야 시간표에 따른 책을 챙기는 게으른 아이였다.

전 시간에 내준 숙제는 그날 쉬는 시간에 다 해버리고 집으로 숙제를 가져간 적이 별로 없는 내가, 간혹 쉬는 시간에 앞서 있은 시간의 숙제를 못 할 때는 다음 날 아침에 일찍 학교로 가서 해치우는 것이 예외다. 이러다 보니 전날 책보를 그냥 가져가는 날이 더러 있다. 이때 내가 당황하는 것은 전날의 숙제를 검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꾀를 내는 것이 마치 공부를 잘하는 애들 모양, 책과 공책을 한 보자기에 싸놓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보따리가 클 수밖에, 보따리가 크건 말건, 몽땅 싸 다니기로 했는데, 요행으로 도시락을 갖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거리에 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서, 나는 아예 시간표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엉터리 학생이었다.

노는 데만 정신을 파는 기이한 어린이였다. 공부는 학교에 가서 하는 것이지 집에서 공부하는 것은 낙제생이나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하도 공부를 안 하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 앉히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타이르는 일도 있었다.

그 얼마 후 저와 한 학년이 되는 친구가 있는 집을 우리 집 바깥방에 세 들이고 나서 내 생활은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 친구는 나보다 한 살 더 먹었고 숙성해서 소견이 나보다 트였으니 나보다 나은 데다가 훨씬 많이 있었다. 그 친구 부모의 극성이 그를 밤공부 벌레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나의 적수로 치기엔 너무나 버거웠다. 그에게 누나가 있었는데 그 누나도 합세해서 밤 공부를 함께 한다.

자, 그러니 아버지의 눈치를 보게 되는 내가 저녁밥을 먹고 그냥 잘 수도 없고, 마지못해 책보에 책이 가득 쌓인 채 그대로 들고 바깥방으로 건너가게 마련이다. 그러면 우리 집에서는 그 친구와 함께 공부하는 줄 아는 것이다.

나는 몇 문제를 풀다가 그냥 뒤로 훌렁 넘어져 잠들어 버린다. 이쯤 되면 아예 공부 지도하는 친구의 누나는 학습 지도할 엄두도 못 내고, 대신 내 필통의 연필을 모조리 꺼내서 늘씬하고 뾰족하게 깎아놓고는 저희 들 공부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자도록 내버려 두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밤공부가 왜 필요한지를 아직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든 나는 그때도 내 행동에 아무런 가책이나 의무 상실감 같은 것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공부하는 책상이 없었을까! 여기에는 내 공부하는 방법과 우리 부모님의 나의 성장 과정에 대한 믿음이, 어느 시기까지는 맞아떨어짐으로써 가능했던 것 같다.

내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부모님은 익히 아시고 계셨다. 당신들의 느낌과 필요로서는 강행하지 않은, 그런 방법이었다. 따라서 상급학교 진학도 스스로 정하고 내가 서둘러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부모님의 의사는 개입되지 않았다. 이것이 내 인생을 스스로 이끌어 가는 큰 도움이 됐고 평안했다.

아버지의 권유는 내 신체적 조건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 조건에 맞는 직업을 택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즉 팔다리가 한결 기니 일반적인 그때의 일, 농사일은 못 할 것으로 여기셨다. 그러나 내가 공부에 열을 내지 못하고 일등도 더러 하는, 싹이 보이는 그런 애가 아니라서 굳이 목을 매서 끌고 가지 않으려 하신 것 같다.

그 친구는 부모의 극성으로 일등도 하는 애였으니까 모름지기 벌써 유명인이 됐을 터인데, 남쪽에 일찍 내려온 그가 아직 이름을 날린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소위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할 바엔 노력과 의지의 소산으로 발자취가 그려지는 것인데, 그 노력은 각자의 때마다 처한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것이다.

그 동무가 남쪽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보면서도 왜 선뜻 만나려는 계획을 내지 못하는지, 그토록 내 생활이 바쁜지 잠시 생각해 본다. 그 이름 ‘길응철’./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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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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