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쌈은 농촌 아낙네들의 겨울나기 일감이고 남정네들의 새끼 꼬기와 가마니 짜기나 멍석 만들기에 버금가는 노동이고 생활이다.
좁쌀보다 작고 아편 씨보다 작은 삼 씨를 뿌려서 어른들 키에 팔을 위로 뻗어 더해도 닿지 않으리만큼 자라도록 키운다. 이 삼을 베어서 한여름에 삼 구덩이에서 쪄내는 삼 굿은 시골 코흘리개들의 볼거리 중의 하나였다.
이를테면, 삼대의 잎을 털어 내고서 단을 지어 묶어서 시루에 넣고 김을 올려 찌는 공정이다. 큰솥이 없으므로 달군 돌에 물을 부어 김을 내서 쌓아 놓은 삼단 무더기에 보내서 삼을 찌는 것이다. 삼단 더미를 흙으로 덮고 그 앞쪽에 김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내고 그 앞쪽에 깊은 구덩이를 파서 큰 돌을 쌓고 돌을 달구는 아궁이를 만든다. 그리고 김이 새 나가지 않도록 진흙으로 발라 메운 다음 불을 때서 돌을 달구어 물을 붓고 난 다음 나머지 불 아궁이마저도 진흙으로 막아 버리면 김은 고스란히 삼단 더미에 스며들어서 삼대 하나하나를 익힌다.
이웃집 텃밭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일들을 동네 안에 삼밭이 있는 집 텃밭에서 하게 되며 불이 날까 염려되어 반드시 비 온 뒤나 가랑비가 올 때 일을 벌인다.
삼단이 푹 익은 다음 흙을 걷어내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삼단들을 집집이 자기 것들을 가려서 가져가는데, 용하게도 한 묶음도 뒤섞임 없이 찾아간다. 흰옷을 입고 분주히 오가는 동네 분들 틈에 끼어 거치적거리면서도 나를 깨닫지 못하는 철부지, 코흘리개였던 시절이 지금은 삼삼히 눈을 감기게 한다.
우리 집 것은 없다.
텃밭이 없어 심지 못했으니까.
삼 굿자리인 텃밭에서나 혹은 자기 집 마당에서 삼대를 한 대, 한 대식 일일이 손으로 벗기는 것은 뉘 집이나 다 같지만, 껍질을 벗겨낸 희디흰 삼대를 보관하는 방법은 집집이 다르다. 우리 또래 동무들에게는 비할 데 없이 좋은 놀잇감이 되기에, 집집이 각별하게 간수 하는 편인데도 아이들의 유별난 짓은 감당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흘러나와 또래들 손에 들어오게 마련이다.
가을비 온 끝에는 으레 타작 끝마무리인 북데기를 불태우는데, 이 북데기 불에다가 한 뼘씩 자른 삼 속대를 꽂아 불붙여 입에 물고 북데기 불더미를 빙빙 돌며 ‘꼬치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몇 바퀴 돌면 비틀비틀하면서 하나둘씩 짚 낟가리 옆에 쓰러져 갔다. 나도 맴맴 고추 먹고 담배 피웠다. 눈을 떠보니 어머니 얼굴이 방 천장에 가득 차 있다. 이름하여 ‘대마초 속대’다. 지금 짐작될 뿐이다.
그 속대의 용도는 집 지을 때 흙벽 초벌 엮음에 쓰거나, 지붕 잇기 때 깔개로 쓰거나, 땔감으로 쓰였다. 훑어낸 잎과 잔가지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밀매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범죄 다극화 시대에선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모두가 그저 그렇게, 예로부터 해 내려왔을 뿐이다. 신뢰의 대 흐름이 토박이가 되어 뿌리박힌 사람들, 우리 모두의 거리낌 없는 짓이다. 이렇게 시골의 인심은 후했고 서로 믿었다. 모름지기 지금 농촌에서 상추 심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은 아버지가 멀리 ‘회양’에서 삼을 해 오셨다.
삼 하러 가실 때에는 늘 내게도 일 몫이 닥치는데, 사흘 동안에 ‘쇠’ 배를 곯리지 않을 책무가 지워진다. 매일 먹일 ‘쇠꼴(풀:草)’을, 글쎄 ‘쇠꼴’ 망태를 메고 나가본들 그 큰 소의 ‘배지(?)’를 망태의 꼴로 어떻게 채울 수 있단 말인가?
팔월 장마 때인지라 ‘쇠꼴’ 베기가 쉽지 않다. 당부하신다. 새벽에 소를 끌고 나가 배불리 풀 뜯기고, 학교를 다녀와서 또 배불리 풀을 뜯기면 되느니라.
그러나 밤새 배곯을 소를 생각하면 비를 맞으면서도 지게 다리가 끌리도록 큰 지게를 지고 나가지 않을 수 없다. 꼴을 베서 ‘바지게’에 담는데, 왜 그렇게 ‘바지게’가 큰지, 뒤돌아보고 베고 또 뒤돌아보고 베기, 수 없이 하면서 눈을 뜰 수 없도록 비를 흠뻑 맞는다. 지고 발걸음 옮길 만치 베었는데 이번에는 지게를 지고 일어설 수가 없다. 비 맞은 소 꼴은 곱절이나 무거운 것 같다. 아깝지만 쏟아 버릴 수밖에, 소는 멀리 남의 밭 콩 포기를 습격한다. 바쳐놓은 지게 작대기를 나도 모르게 차면서 달려가니 이미 꼴은 반이나 남의 논에 쏟아져 들어갔고, 소는 소대로 콩잎을 여남은 포기나 뽑아 먹어 버렸다. 비가 오는 때여서 보는 이가 없었기 다행이다. 봤으면 뉘 집 아들이고 어른은 어디 갔으며 왜 비를 맞는지 알려야 하는 호통을 받아야 한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빗줄기뿐이다.
이 행사가 금 년에도 어김없이 치러진다.
‘어머이’는 여름내, 오후 한나절 한때 오리 길 바닷가에, 가자미 배가 닿을 즈음에, 곡식을 자루에 담아 이고 가셔서 가자미와 맞바꾸어 오셔서 배 따고 정성 들여 말려서 모아두셨다.
‘아버이’는 고기 꾸러미를 한 짐 지고 영 넘어 ‘회양’ 땅에 가셔서 베껴 말린 삼 다발과 맞바꾸어 오신다. ‘곡식’이 ‘삼’ 되는 턱인데 거기에 고기가 끼인 것을 보면 아마도 생선값이 곡물보다 비쌌나 보다. 무리를 이루어 대장정(長征)이 시작되는 때는 영동과 영서가 한 구름에 덮여서 지루한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다.
돌아오실 때가 돼서는 더더욱 신경 쓰이는 ‘쇠’ 배다. 양쪽 마지막 갈비뼈와 뒷다리 안쪽 등허리 밑이 두둑해야 배부른 형이고 그 자리가 쑥 들어가 있으면 배가 덜 부른 모양임을 나는 익히 안다. 아버지의 미소가 답해주므로 해서, 오랫동안 감지하여 얻은 무언의 가르침, 그래서 알고 있는 터인지라 우선은 쇠 배가 신경 쓰인다. 아버지의 그 머금는 미소가 나의 소먹이 성실(誠實) 점수로 나타나니 그렇다.
오랫동안 똑같은 일을 겪으시는 할머니는 손자들 학교와 의복 시중을 드시고, ‘어머이’는 안절부절, 오시는 날 일직부터 서둘러 밥을 도시락 광주리에 담아 이고 영마루까지 마중을 나가시는데, 집에 당도할 때 보면 삼단 몇을 덜어서 머리에 이고 오시는 것이 고작이다. 삼베 고의적삼은 흥건히 젖어 축축 늘어져 감기기까지 하는 무더운 장마철, 비를 맞다가도 햇빛을 받으니 젖고 마르고, 하는 길고 고달픈 행로였다.
등짐을 벗고 먼저 가보시는 곳이 외양간에 매여 있는 소였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입가가 귓가에 닿았고 이가 하야케 드러나셨다.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시며 대견해했다. 에이그 언제 커서 내가 마음 놓고 밖에 나들이인들 하겠나 싶으셨을 것이다. 아무튼 이번엔 수고했구나! 말은 없었지만 내 귀엔 지금도 메아리친다.
삼은 여러 갈래의 손질은 거쳐서 스물넉 새서부터 열두 새까지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처음부터 삼 껍질의 질로 구분하기 시작하는데, 고운 옷감을 짜기 위해서는 색깔이 붉고 삼의 올이 가늘고 얇아야 하고 성근 일복을 짜기 위한 실감은 그대로 막 생긴 삼이라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 삼 올도 끝부분에 가지가 없던 것일수록 좋다. 그것은 삼을 가늘게 켜기 위해서 갈라 쨀 때 그 마디 자리가 매쳐 끊기거나 갑자기 가늘어져 그 자리에 다른 올을 잇대거나 다른 가는 삼을 아사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류한 때부터는 별도 관리가 이루어진다. 처음 일부터 아주 세심하게, 마지막 옷감이 짜질 때까지를 통틀어 생각하지 않으면 그 일들이 점점 진행하는 과정에 손길을 하나씩 더 보태야 한다. 그래서 세심(細心), 신경 써서 한 올 한 올을 정성 들여야 한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길쌈 철이 시작되고 얘깃거리가 풍부해지면서 하늘에서 눈을 내리게 한다. 들판은 아득히 먼 타국의 자리로 물러나고, 이웃의 안방은 내 집 안방과 맞붙여지고, 우리 집 골치가 남의 집 걱정이, 남의 집 기쁨이 우리 집 웃음이 되는 때가 된다.
한 줌씩 묶인 삼 타래는 전날 저녁 물에 불린다. 다음 날 아침 해가 창문에서 나뭇가지 그림자를 밑으로 내리밀어서 천천히 사라질 때쯤, 이미 설거지를 마친 ‘어머이’는 채를 오른팔 죽지에 끼고 다듬이 칼과 도마를 한 손에, 삼 다발 그릇을 다른 손에 쥐고 나서신다. 마른날인지라 고무신을 제치고 ‘짚세기’를 신으시고는 종종걸음으로 이웃집으로 들리신다.
방안에는 이미 세 귀에 다른 이들이 앉아 있었다. 한 쪽 귀에 자리하시고는 체는 오른쪽에, 도마와 다듬이 칼은 앞쪽에, 삼 다발은 왼쪽에 놓는다. 오른 오금을 세우고 치마를 무릎 위로 걷어 올려 자세를 갖춘다.
우선 삼 한 올을 되도록 잘게, 그것도 고르게 째서 삼 올 대가리라고 하는 뿌리에 가까운 쪽을 도마 위에 놓고 심 칼로 대가리 쪽을 훑어 얇게 한다. 톱 는다. 그 끝은 아주 가늘고 얇아서 다음 삼 오라기를 이어도 마디가 굵어지지 않도록 해야 다음에 베 짤 때 ‘바디’에 실마디가 걸리지 않고 매끄럽게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어머니 스스로 짜실 날실을 아무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칼로 다듬고 앞 이로 훑어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서 손톱으로 한 올의 머리 부분을 두 가닥으로 갈라서 무릎 위에 얹고 그중 한 가닥과 이어 나갈 다른 삼 오래기 꼬리 부분을 같은 길이로 하여서 무릎 위의 두 가닥 중 한 가닥과 겹쳐서 손바닥을 대고 밑으로 내리 비빈 다음 다른 한 가닥을 맞대고 이번에는 위로 비벼 올린다. 이로써 두 줄기의 삼 올이 한 길이의 날실 끈이 되었다. 반복된 작업이 이어져서 시간과 함께 이야기의 흥미를 타고 길게 이어진다.
날이 가고 달이 차서 스무 자 한 필에 스무넉 새면 이백팔십 자를 이어내야 비로써 한숨을 돌리고 또 다른 질을 갖춘 삼베 짜기의 구상이 시작된다. 한 틀의 베를 어떻게 가늠하여 실의 길이를 재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저울도 없고 부피를 재는 계량기 또한 없다. 다음 공정인 ‘돌개질’ 때 실오리 가락을 세어 스물네 가닥을 만들면서 가늠하는가 보다.
‘돌게 채’가 그렇게 많을 수 없다. 그렇다고 방바닥에 그냥 깔아놓는다면 손주(자) 녀석들 장난에 헝클어지고 끊어지고 뭉개져서 속 끓이나 했을 터인데, 할머니의 지혜는 이점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룻밤 동안 방 윗목에 채를 엎어서 그대로 쏟아 두면 손자들이 자는 사이에 마르고 이를 이튿날 주먹만 한 것으로부터 시작해 감아 말아서 물동이만큼 크게 만들어서 우리 손이 전혀 닿지 못하는 높이의 방안 벽에 맨 실 건(선반) 위에 나란히 올려놓는다. 웬만큼 되었을 때 얼레 채에 두루 얹는다. 얼레를 차리면 방은 얼레로 꽉 차고, 윗목에 가지도 못하고 할머니 곁을 얼씬거리지도 못한다. 그래도 내가 할머니께 응석을 부릴 틈은 있게 마련인데 바로 물레가 정지했을 때다. 이때는 엉클어진 타래를 풀고 막 돌리려고 할 때인데, 나는 앉은 채로 그 물레를 한쪽 손으로 지그시 잡고 있으면 돌아가야 할 물레가 돌지 않는데도 헛손질로 자꾸 돌리는 시늉을 하신다. 그때마다 물레는 반동으로 거꾸로 움직이는데, 머리에 쓰신 흰 융단 머릿수건을 벗으시고 물레의 밑을 고개 숙여 보시는데, 아무리 키 작은 나지만 들키지 않을 수 없다. 할머니는 팔을 내 저으시면서 이쪽으로 달려오신다. 그러나 처음이 아닌 내가 피할 리가 없다. 밑으로 기어들어 가면 그만이다. 할머니는 그대로 봉당에 가시고, 그다음 들어오실 때는 엿 그릇이 할머니 손에 들려있고 곧 내게 건너질 차례다.
얼레에서 벗겨낸 다음, 타래 지어서 다른 많은 타래와 함께 검은 껍질을 벗기는 표백 작업을 하는데, 이를 ‘재 내림’이라고 한다. 봄까지 이어진 갖가지 과정이 모두 합쳐 이어지면서 여러 개의 실타래가 되었는데 어느 한 날을 잡아서 ‘재 내림’을 한다.
볏짚을 많이 태워서 흰 재가 되기 전 검은 재가 됐을 때 불길이 사그라지게 해서 이를 큰 소쿠리에 담아 놓고서, 소죽가마에 ‘쌍 바리’를 걸쳐 놓고 그 위에 재 소쿠리를 얹으신다. 끓인 물을 부어 잿물을 내린다. 그 가마솥에 실타래를 넣어 다시 끓인 다음 식은 후 실타래를 건져서 소달구지에 싣고 물이 콸콸 흐르는 봇도랑에 가서 헹궈낸다. 실타래 뭉치가 무거우니 이때에는 식구가 모두 매달린다.
이 모든 일을 낱낱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등에 업혀서, 걸리고 딸려서, 수없이 보아온 내 눈엔 안 보아도 본 듯 선한 손놀림이자 몸놀림이고, 순서였다.
빨랫줄에 널어 말린 실타래 가운데 날줄이 될 실타래는 날고, 씨줄이 될 실타래는 내려서 수숫대에 감아서 꾸리를 만들어 두었다가 베틀에 올릴 때 ‘북’에 잰다.
날실을 날 때는 날씨가 좋고 바람이 없는 날을 택해서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실타래 한 뭉치를 한허리를 뚝 잘라서 그 한끝을 묶어서 큰 쌍갈래 나무틀에 박힌 ‘용두머리’에 붙들어 맨다. 다른 한 끝은 그 실타래를 편 길이만큼의 거리에 지게 다리 같은 말뚝 두 개를 가지가 뒤쪽으로 가게하고 나비는 짜는 ‘베 필’의 나비와 양 날개를 부친 것만큼 큰, ‘도투마리’를 걸칠 수 있는 나비의 땅에 박고 움직이지 않도록 큰 돌로 바쳐 단단하게 해 놓는다. 이 양 끝을 당겨서 팽팽히 한 다음 한쪽 끝의 실을 한 올씩 ‘바디’에 꿰어서 나가는데 구멍 난 대 막대를 기준 하여 한 올은 막대‘위로 다음 올은 막대 밑으로 뽑아서 각각 ‘배대’에 맨다. 이렇게 해서 마흔여덟 개를 다 마친 다음 그 전부의 올 끝을 한 대의 ‘배대’에 단단히 매서 이 ‘배대’를 도투마리에 붙들어 매어서 다리에 거쳐놓고 ‘용머리 쌍 다리’를 뒤로 댕겨서 돌을 올려놓는다.
이제 풀을 먹여 솔로 빗질하며 모닥불로 말려가면서 도투마리를 감아 댕기면 된다. 솔도 또한 억센 것과 보드라운 것이 있어서 그 용도에 맞춰서 쓰인다. 풀을 쑤어 담은 질그릇에다 물을 붓고 개어서 적당하게 묽게 한 다음 솔에다 묻혀서 모닥불 위의 실을 고르게 펴서, 문질러가면서 쓸어서 실올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서 풀칠한 후 빳빳하게 말린 뒤 ‘뱁대’를 깔아 가면서 도투마리에 댕겨서 감는다. 한 ‘도투마리’에 여러 필을 얹어서 도투마리를 내리는데 이 작업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쉴 새 없이 이루어져서, 할머니를 대단히 피곤하게 하는, 큰 공정이다. 아무도 이 작업을 거들 수가 없다. 세심한 손길이 가는 것이기에 정신을 모아야 하니 수시로 드나들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도투마리를 가득 찬 뒤래야 새로 풀 먹이기 작업이 이루어지는데, 늘 어머니는 이 일로 해서 마음이 쓰인다. 조마조마한 베 짜는 일은 일상의 일을 마친 뒤라야 하게 되니 잠시도 쉬실 시간이 없다. 내년을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의 고달픈 이 순간을 기쁘게 참여하시는 어머니는 모든 일에 순종하신다.
베틀을 차리는 일은 아버지의 몫이다. 이때에도 나는 쓸모없는 거추장스러운 방해꾼에 머무를 뿐이다. 눈치 빠른 나는 대문 밖 문설주에 기대여 그 차리는 모양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고 눈여겨본다. 여러 묶음의 베틀 뭉치를 외양간 처마 밑에서 꺼내 오시고 또 다른 베틀 뭉치를 가지러 가시는 사이에 어머니는 얼른 봉당 바닥을 쓸어서 차릴 자리를 마련하시고, 아버지를 도우신다.
토막나무들이 궤로 맞춰지고 옆 지를 살들을 건너지르면 대강의 뼈대가 이루어지고, 이제 앉을 자리를 높낮이로 조절하고 내 키의 배나 됨직한 높이의 베틀 뒤쪽의 위에 날실이 감긴 ‘도투마리’를 얹고 ‘바디’를 당겨서 허리에 찬 띠에 고정한 다음, 서로 엇갈린 날을 가른 막대를 기준으로 한쪽 날을 한 올씩 굵은 철사 고리에 걸어서 뺀 다음 이를 모아서 한 작대기에 가지런히 매어서 전체가 움직이는 틀 위에 고정한다.
이 가름 나무통에다 기다란 꼬리 모양 휜 나무를 꽂아 뒤로 내서 끝에다 끈을 달아낸다. 이끈 길이가 베틀 위에 앉은 어머니 발 위치에 맞게 늘이고 끈 끝에다 ‘짚세기’ 한 짝의 ‘코’에 매어 단다. 이로써 모든 차림이 끝났다. 하지만 마무리 잔일은 아직 남았다.
‘바디’를 ‘마디 집’에 넣고 ‘북’에다 ‘꾸리’를 쟁여 넣는다. 꾸리의 속 ‘수수깡 때’를 빼고 안쪽의 실올을 꺼내서 북통의 옆에 뚫린 구멍으로 빼내서 날실 한쪽 끝에 매고 발을 당겨서 ‘고’를 올리면 날실 중 한 줄 건너씩 올라가는데, 그때 ‘바디’를 앞으로 올려 내밀어서 올린 다음 그 사이로 북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주둥이를 넣고 오른손으로 밀어 미끄러뜨려 왼쪽으로 빠져나오면 왼손으로 이를 받아내고 앞으로 내밀었든 ‘바디’를 앞으로 당기면서 씨 올을 다진다. 그때 발을 뻗어서 날실의 엇갈린 절반을 내려서 이번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해서 집어넣고 이를 오른손으로 받은 다음 ‘바디’를 몸쪽으로 당기면서 씨실을 다진다.
길쌈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한을 알알이 담아 푸는 한풀이의 장(場)이었다. 거기에 녹아내린 눈물과 한숨이 씨가 되고 올이 되어 내 살을 가렸다.
철부지 나, 볼거리 많아 즐거웠다.
철들은 나, 그 옷 사타구니 쓰려 볼멨고, 그 옷, 바람 새어 시원했다. 그러면서 내 동경(憧憬)의 그날을 그 실처럼 이었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