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태어난 우리 승용차 ‘포니’를 몰고 먼지 꼬리를 길게 늘였다. 넓은 들판 위에 섬처럼 떠 있는 나지막한 언덕 산, 그 등성이를 꼬불꼬불 기어갔다. 새로 지은 집들이 산등성이를 따라 아무렇게나 자리 잡아 드문드문 보이더니 곧 피난민촌 같은 새 마을이 눈에 들어오며 마을을 열었다.
휘어진 능선 아래 양지엔 푸른 감나무가 옥수수튀김 ‘팝콘’ 같은 꽃을 가지마다 붙여놓고 있다. 꽃가지는 짙푸른 잎사귀를 비집고 햇살을 받으려 비벼댄다. 바람과 의논한 듯, 장단 맞추어서 속삭이며 춤추고 있다. 흙담 위에 얹힌 ‘곱 새 이엉’이 우거진 감나무 사이사이로 토막 처 보이고, 장독대 옆에는 담을 끼고 나란히 봉숭아꽃이 피어 있을 것 같은 울안이 보인다.
연달아서 물고 물려 이어지는 마당과 뜰 안이 나무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전에는 산이었던 이 언덕 밑은 예부터 터 잡은, 오래된 마을임을 겨우 알아보게 한다.
후미진 곳은 푸르고 싱그럽다. 한길 양옆은 황토 바닥이 돌처럼 굳어있다. 그러나 한길 가운데는 콩가루 같은 보드라운 흙이 쌓여서 신이 파묻힐 것 같다. 발길에 부서진 황토 흙가루는 물결을 이루어 움직이고, 이따금 언덕을 넘는 바람에 실려 길가의 풀 섶을 회색으로 칠하고 언덕 밑으로 밀려난다.
이루어진 새 동네, 이곳이 개척의 무한한 손길을 기다리는 새마을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아서, 방문객 나마저 비장하게 한다. 쉴 수 있는 정원이나 가로수는 볼 수 없다. 녹지란 말할 것도 없고 집집엔 담도, 울도 없다. 앞집이 내 집 아래채요 뒷집이 내 집 뒤채가 된 듯하다. 갓 주둔한 병영 같은 언덕배기 마을이다.
당연히 있어야 할 터이지만, 길가의 덩치 큰 새 정미소가 새 터전을 마련하려고 필사의 각오로 들어온 이곳 새 이주민들의 안방구석에 쌓아둔 볏섬을 공용 같은 입을 벌려 빨아들여 삼키려는 듯 시꺼멓게 벌리고 있다. 문이라기에는 걸맞지 않다. 온통 벽 하나가 통째로 문이 되어서 마을을 향해 달려들 듯이 노려보고 있다. 어쩐지 서글프다. 정미소 안은 텅 비어있다.
길을 오가는 사람도 없다. 그 흔한 소주병이나 과자부스러기를 파는 가게도 없다. 인적조차 없는 이 언덕에 똑같은 집을 뒤져 가며 번지를 알아내서 친구를 찾아야 한다. 방앗간을 향해서 몇 발짝을 옮겨가다 불현듯이 내 생각이 회오리를 이루었다. 이 친구를 얼마 만에 만나는 것인지를 따지기 전에 이 친구의 얼굴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우선 급하다.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당황할까? 하여 잠시 머물러서 눈을 감는다.
삼십 년 전 춘천의 어느 군부대에서 우연히 연병장을 스치면서 서로를 순간적으로 알아보는 기이한 만남이다. 이곳은 근무처를 배속받는 보충 병력을 수용하는 부대이니 언제 어디로 누가 먼저 배속돼 떠나갈지 알지 못한다. 각자가 자기의 능력껏 줄을 대어 빠져나가는, 갈아타는 정거장이나 다름없다. 근무를 좀 더 편안히 하고 죽을 위험이 조금이라도 적은 후방부대로 배속받으려고 초조히 하루를 지내면서 소식을 기다리는 이등병들로 연병장은 갈까마귀 떼가 되어있다.
이런 틈에 서로를 순식간에 알아본다는 것은 우리 특유의 시골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우리는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누구든지 나를 인정하고 대화할 수 있는, 바늘구멍 같은 기대라도 가질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서 거기에 매달릴 수라도 있었으면 싶은 심경을 얘기하면서도, 서로의 지난 일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며 허덕이고 있었다. 이 넓고 황량한 벌판에서 아무도 없을 줄 알던 나, 이 병영 안에 나를 알아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 나는 기뻤다. 한동안 서로 얼싸안았다가 잠시 뒤에 또 길길이 날뛰었다. 나 혼자만의 절정에 달한 기쁨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친구와 이야기하는 동안에 서서히 드러나고 마는데, 나는 점점 상대적으로 외롭기 시작했다. 친구는 자기의 일가친척을 들먹이며 누구는 어디 있고 누구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우리 고향 사람들이 그 회사에 많이 들어가서 먹고사는 데는 걱정이 없다며 너스레를 늘어놓았다.
나는 이제까지 잠자던 외로움의 그늘이 점점 더 짙어졌다. 이제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온하던 내 마음이 오히려 친구를 만남으로써 친구가 부러워지며 내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용소에서 고생한 것은 우리의 일상 얘기에 지나지 않고, 앞으로 있을 향배가 오히려 나를 짓눌렀다. 친구는 울타리를 이미 친 것처럼 담담했다. 이곳에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던 나와 비교해서 친구는 자기의 이웃 동네에 와있는 것처럼 태연했다. 그래도 나는 백만 대군을 원군으로 얻은 것처럼, 한편으로는 기뻤다. 나야 물론 터전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하드래도 친구는 내게 무엇인가 매개 수단을 풀어놓을 만도 하련만 그저 지나가는 얘기뿐이다.
짧은 시간의 만남으로 우리는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망각 속에 묻어놓고 각자의 부여받은 생리 기관의 단순 활용을 위해서 살아온 꼴이다. 우여곡절 끝에 스스로 오랜 시간을 갈증 해소의 수단으로, 동질의 대화상대로서 만나고 싶어서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
우리는 누구보다 많은 얘깃거리를 갖고 있을 것 같다. 그 폭도 어지간하게 넓은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의 호흡이 맞을 듯하다. 정확히는 초등학교에서 육 년, 중학교에서 일 년을 같이 지냈고, 수용소에서 삼 년을, 서로 모르는 철조망 안에서 지냈지만, 생활은 같았으니 같은 대화 폭을 갖는다고 할 수 있는 친구다. 내가 이제까지 친구를 찾지 않은 것은 온전히 내 입장이 그랬던 것이지 보고 싶고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는 동안의 발자국은 네 발자국을 넘지 않았다. 이윽고 목이 제쳐지도록 높은, 문틀을 쳐다보며 방앗간에 들어섰다. 바깥 공기와는 사뭇 다르게 써늘했다. 조용하고 텅 비어있는 방앗간의 한구석 의자에 앉은 두 노인에게 다가가서 친구의 이름을 대고 도움을 청했다. 그들도 무료한 오후를 졸고 있던 참에 다가온 외지인에 관심을 가졌다. 나의 방문에 귀찮기보다 외로운 섬에서 난파선을 보는 것처럼 반기며 흔쾌하게,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길가의 나지막한 ‘블록’ 위에 ‘슬레이트 지붕’을 인 네 칸짜리 ㄱ자집 마당 구석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이 지역 산물이 아닌 것이 확연한, 통나무 토막이 무릎을 이길 만큼 높게 가지런하게 쌓여 있다. 필시 이것은 친구의 처가에서 지원한 비상용 땔감일 것이라는 인상을 받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신록의 오월임에도 마당은 풀포기 하나 없이 누런 진흙과 흙먼지뿐이다. 그 위로 비스듬히 매어진 빨랫줄, 그 그림자가 길게 그어서 앞집 그늘에 이어져 있다. 죽은 나무 바지랑대가 이 빨랫줄을 떠 밭이고 있어서 그나마 이 집이 사람이 사는 집임을 알 수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주머니는 꼬마 아이를 건넛방에서 불러들여 들로 내보내며 한참을 기다리란다. 부인은 기다리게 함이 미안한지 몇 번을 다져서 한참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나 의외의 일에 당황해하면서도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허리를 자르지 않을 수 없다는 단호한 판단인 듯, 기꺼이 남편의 들일을 중지시킨다. 그렇지 않겠는가. 왜 아니 기쁘겠는가. 이 세상에 자기 남편을 찾아오는 먼 곳 손님을 보지 못했던 아주머닐 수도 있다.
대여섯 살 먹음직한 아들을 들로 보내면서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어린이가 뛰어가는 곳을 따라 나도 천천히 걸어서 방향을 잡아 가까이 가려 했다. 이렇게도 시간이 길 수가 있단 말인가. 얼마간 한길에서 기다리던 나는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고갯길 산마루에 올랐다.
멀리 서쪽에 바다로 이어지는 푸른 들판을 내려다보며 지난 어린 시절을 상기했다. 잠시 후면 내 앞에 나타날 내 친구, 내 동무와의 만남에 앞서서 옛 기억을 더듬어 본다.
‘금란’의 ‘인민학교’에서 벌어지는 인근 '인민학교' 대항 축구 경기를 구경할 겸, 우리 학교의 출전팀 응원도 할 겸, 일요일 아침 일찍이 모여 ‘금란’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가는 길 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름을 낯 낯이 기억할 수는 없지만 유독 이 친구와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다른 친구만은 또렷이 떠오른다. 내 그때의 생각이 지금껏 이 친구를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는, 그런 기발한 생각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친구는 우리 일행이 모여 떠나기로 한, 우리 학교의 바로 옆에 살고 있으면서도 제시간에 대지 못하고 우리를 출발시키고 말았다. 먼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코앞에 있으면서 제시간에 오지 않음은 필시 의사가 없거나 변고가 있어서일 것이라는, 우리들의 의견이 합쳐져 우리는 곧 출발했다.
큰 다리를 건너고 효자문을 지나서 열녀문도 지나고 언덕 위에 펼쳐진 벌판에 들어설 무렵에 헐레벌떡 따라온 친구가 바로 ‘뚱보’였다. 이 친구는 우리 모양과는 다르게 생겼다. 그때의 또래와 다르게 우량아 기질을 타고난 듯, 실하고 통통해서 우리들의 부러움을 샀다.
나는 유난히 마른 형이라 이 친구에게 살찌는 비결을 물어본 적이 있다. 이 친구가 말하기를 매일 아침에 깨어서 바로 냉수를 한 그릇 마신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살이 찌는 것인지는 몰라도 남다르게 먹는 것은 그것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다음 날부터 실행하려고 마음을 다졌지만 이룰 수 없었다. 물 마시는 것 자주 잊고, 그 전날 물 들이켤 일을 하지 않아서인지, 그 무렵의 내 식성은 물을 멀리하고 있었던 탓도 있을 성싶다.
이 친구가 미안한지 너스레를 떠는데, 그 너스레보다도 웃겼던 것은 이 친구가 걸으면서 내는 피리 소리다. 그것도 ‘가죽 피리’ 소리다. 그런데 그 소리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걷는 발걸음에 맞추어 여러 번, 아마 수십 번은 족히 소리 냈을 것이다. 그 소리는 우리를 따라 붙이려는 친구의 발걸음이 빠르고 느린 걸음에 따라서 소리도 다르게 울렸다. 아마도 밀착된 피부의 파열 상태가 소리를 다르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지금에 와서 해본다. 이 친구가 소화력 좋아 대식하는지는 몰라도 물을 많이 마신다는 것이 음식량과 관계되어 있을 듯도 하다.
우리는 시간 내에 ‘금란’ 이라는 곳의 ‘초등학교’에 당도해야 하지만 이런 걸음으로는 맞추어 댈 것 같지 않다는 판단도 있어서였든지 이 친구의 ‘가죽 피리’ 소리에 한바탕 웃으며 걷기는 했어도 퍼져 앉아서 노닥거리지는 않았다.
이날의 경기는 일찌감치 예선에서 탈락하고 그 후 우리의 거취는 기억되지 않는다. 이 친구와 있었던 이날의 일대 사건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연달아 나는 ‘가죽 피리’ 소리를 그때까지 들어 보지 못했던 내가 친구의 ‘가죽 피리’ 소리가 유달리 느껴,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멀리서 들리는 경운기 소리가 바닷가에서 나는 작은 어선의 소리와 같았다. 바다를 낀 넓은 호수인 ‘남양만’의 한 귀퉁이를 이루는데도 이 들판은 우리 전 국토에 펼쳐진 들판같이 넓게 보였다. 지금이 한창 일할 시간이므로 경운기 소리가 날 수가 없는데도 외롭게 멀리서 들리는 경운기 소리가 이 친구의 헐떡이며 달려오는 숨소리인 걸 내가 알 까닭이 있으랴. 다시 눈을 감고 친구의 옛일을 더듬는다.
소 당번을 할 때 풀 뜯으러 ‘강터 고개’를 넘어서 솔밭을 헤매든 일이며 운동시간에 철봉의 배지기 돌기 못하는 뚱보의 모습이 일시에 내 눈앞에 그려지고 지워진다. 점점 가까이 들리는 경운기는 고개를 넘어서 이쪽으로 오더니, 친구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자 나도 일어서고, 이윽고 어린이가 달려왔다. 산 아래로 단숨에 달려갔고 해후의 순간을 맞았다.
친구는 경운기를 한쪽 구석에 세우자마자 내게로 달려오고 둘은 껴안았다. 옛날 춘천에서 보았던 친구는 온데간데없고 늙은이가 앞에 섰으니, 기가 막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정작 친구의 부인이었다. ‘아유 우리 주인은 이렇게 늙은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적이 미안해서, 아주머니의 얼굴은 정말로 대조되는 두 친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저녁 준비를 하려 든다. 그러나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 나의 실례를 이유 삼아서 만류하고 입은 채로 마루에 걸터앉아서 서로의 주소와 전화번호부터 주고받은 다음 친구 내외와 그의 아들딸 셋이 한자리에 모여서 급한 대로 사진 한 장을 찍어놓고 한숨을 돌리며 서서히 얘기 보따리를 끌러놓을 참, 나는 그때야 엉덩이를 방바닥에 붙였다.
얼마나 고독했으면, 얼마나 말이 막혔으면 이렇게 행동을 거꾸로 하기까지 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못 만날 것 같은 두려움조차 들었겠는가. 나는 새 한 마리를 잡아놓고 이 새를 관조하는 동안에 훌쩍 날아가 버릴 것 같아 새 장 안에, 새장이 마련되지 않았으니, 자루 속에라도 가두고 나서 보자는 심보 같은 행동을 하고 말았다. 다시는 날려 보내고 싶지 않은 새, 뚱보 ‘유기일’ 동무였다.
해거름에, 악수만 굳게 나누고 다시 차에 오른 내 마음은 한껏 기뻤다. 내가 입을 벌릴 수 있는 말벗이 생겼고 우리의 고향을 얘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친구가 있다. 외로움을 물리칠 원군을 얻은 것처럼 가벼운 마음이었다.
집집에 햇볕 깔린 땅은 한 뼘도 없이 그늘로 이어지고 맞붙었다. 동네를 빠져나온 나는 차를 세우고 뒤돌아본다. 내 그림자는 길 한복판을 길게 가로지르고, 숲속으로 숨었다. 멀리 수원 평야가 바다처럼 수평을 이루고 붉은 저녁노을이 서해를 불태우고 있었다. 떨어지는 저녁 해가 붉은 구름과 노란 구름, 머리에 이고 실 같은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는 날아갈 수 없는, 끈에 매여진 새가 되어서 아직 그 터전을 맴돌면서 오 남매를 시집장가보내고 환갑잔치까지 했다. 동네 사람들을 몽땅 불러서, 한풀이하듯이 잔치를 벌였다. 사진에 찍혔든 어린이가 자라서 친구를 업고서 빙빙 도는 잔칫날의 정경이 세월을 짐작하게 했을 뿐이다.
친구의 환갑잔치 날, 나는 그날까지 내 나이를 잊고 있었다. 그를 통해서 내 나이를 대리 셈하고 있었다. 내가 관객으로서 객석에서 홀로 중심에 서 있고 친구와 그 가족이 무대에서 인생의 역정을 연출하는 무대다. 이 무대 위에 잠시 오르긴 했어도 한 번도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출연하지 못했으니 나는 아직 분장도 해보지 못한 관객의 수준에서 그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친구의 부인이 보는 나는 아직 철부지 애머슴에 다름이 아닌 풋것이라는 생각을 아울러 했을 것이다.
친구는 나름의 갈 길을 일찌감치 정해놓고 열심히 일하며 옆 돌아보지 않았다. 친구는 대대로 이어받은 탁월하고 장대한 체력을 밑천으로 일로매진하여 오늘을 이루고 있다. 나는 이제야 그가 어렸을 때 건장한 체격과 우렁찬 ‘항문 파열음’을 연속적으로 냈던 역량을 이해하게 된다.
삶의 인고를 이마에 선명하게 파서 그리며 자신 있게 새기고 당당히 들어내는 친구의 행적을 어느 누가 감탄하지 않겠는가? 그는 평생 무엇이 나을까? 어떻게 하면 편할까? 생각해 보지 않고 이 길이 천직이요, 내가 갈 길이 이길 뿐이라는 확고한 목표와 신념을 잃지 않고 하루 같이 살았을 것이다.
친구에게 여생의 보람이 가득 차 넘치기를 바랄 뿐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