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고을마다 그곳 각 기관이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일정’ 시대에는 그들의 집단방어를 위한 듯, 한결같이 잇달아서 지었고, 그래서 찾기도 쉬웠다. 으레 ‘면소’가 있으면 ‘주재소(파출소)’가 있고 또 ‘소방서’가 있는가 하면 ‘학교’가 있고, ‘금융기관’이 있다.
이들의 명목상 우두머리는 조선인 ‘면장’이지만 그 실권은 ‘주재소(파출소)’ 장이다. 그들이 차고 있는 칼의 길이와 크기에 따라서 지위가 가늠되는 것이, 우리 꼬마들의 식별 기준이다. 그 칼에 얼마나 큰 ‘쇠불알’을 달았느냐가 또 우리 꼬마들의 관심거리다. 그래서 우리들의 관심은 당연히 제복을 입은 순사들에게 있지, 사복을 한 일본인들은 그 지위를 알 수가 없어서 관심 밖이다. 그가 얼마나 높은지 모를 뿐만 아니라 두려움도 없다.
지금도 그들 칼의 손잡이 언저리에 달려서 덜렁거리는 ‘쇠불알’처럼 생긴 것이 무슨 용도에 닿는지 모른다.
한데, 하루는 조회 때에 칼을 차지 않은 일본 사람 중에서 제일 무서운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내일 ‘시가꾸’ 선생이 오신다고 하면서 학교의 안팎을 단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교장 선생님보다 더 높은 선생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의문이 생기면서 몹시 궁금하기까지 했다. 칼은 얼마나 큰 것을 찾고 ‘쇠불알’은 어떤 것을 찾는지 보고 싶었다. ‘시가꾸’ 선생은 이름이 ‘시가꾸’인지 아니면 네모 자비인 ‘시가꾸’ 모자를 쓴 대학생인지를 분간할 수 없어서, 더욱 초조히 그날을 기다리는 바보짓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상급생들은 보아서 알고 있을 터이니 물어보지 않았을 테고, 나 모양 모르는 애는 창피해서 안 물어보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날부터 이틀을 학교 뒤에 쳐진 나무 울타리 밑에 검불을 줍고 풀을 맸다. 나무 울은 ‘고노데가시와’로 되어있다. 교장 선생님이 심었고 교장 선생님이 직접 다듬는 나무다. 지금은 간혹 시골 기차역 주변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다. 향나무 같은 잎이 연달아서 나 있고 침엽수인지 활엽수인지는 모르나 늘 푸른 나무다. 잎이 무엇에 눌린 모양, 납작하게 뭉개진 듯이 돼서 한 가지에 아기 손바닥만큼씩 붙어있는 나무다. 이 나무는 내가 학교에 들어간 뒤 위 학년 애들이 교장 선생님 지도로 심었는데, 나무를 구해오고, 신을 벗고, 옷 걷어붙이고서 심었다. 교장 선생님의 이 나무에 대한 애착이 우리를 이 나무 이름을 기억시킨 것이다. 전교생에게 이 나무 이름을 알리고 물을 주고 가꾸도록 했으니 오죽했으랴.
그래서 나는 이 ‘고노데가시와’가 ‘시가꾸’선생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날이 왔다. 조회 때, 긴장과 흥분 속에서 소개받은 ‘시가꾸’선생은 우리 보통의 선생보다 키도 작고 머리에 ‘시가꾸’모자도 안 썼으며 더구나 그 무서운 ‘순사복’이나 칼, ‘쇠불알’도, 입고 차지 않았다. 한참 후에 그것도 해방이 되고 나서야 그가 ‘장학사’임을 알았다. 어리석은 학교생활을 했으니 응당 그럴 것이지만 발음의 동일성을 지금도 탓하고 싶은 심경이다. 하지만 그‘시가꾸’도 ‘쇼가꾸’인 것을 잘 못 듣고 나름으로 생각했던 그 일이 생생하다. 다만 우리나라 말이 아니니 어찌하랴.
사람의 마음은 이상하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 많은 문물을 접했건만 그리움의 차도를 순서로 말한다면 옛것에서부터 점점 오늘에 이르는 역순인 것 같다. 왜 그럴까, 이다음에 골똘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우리 모교의 그리움이 그것이다. 우리 학교의 울타리는 사면 중 앞면은 철길 둑이고 뒷면은 ‘고노데가시와’ 나무 울타리고 오른쪽은 면 소와 교장 사택과 텃밭으로 되고 나머지 왼쪽이 허술한 민짜 돌담이다. 그런데 이 돌담이 지금도 내 마음에 거슬리고 우리 학교를 안정되지 못한 것처럼 비치게 한다. 돌담 곁을 지날 때마다 느꼈다. 어깨와 나란히 싸여있는 이 돌담은 우리가 기대면 무너질 것 같았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심지 않은 그담은 필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 학교의 출신들 몫인 것 같다. 살아오면서 여러 곳의 학교를 보아왔으나, 우리 학교처럼 허술한 데도 없는 것 같아서, 아쉽고 안타깝다.
이미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 돌담이 무엇인가 못한 우리 학교의 설립공로자인 어느 전직 면장님의 유지가 헛되이 버려지는 느낌이 들어서 또 서운하다. 지금은 많이 변모했겠지만, 내 옛날은 흐트러지지 않으니 그렇다.
이 한 면의 담을 쌓기 위해서라도 가보아야 하겠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