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 한 되

외통인생 2008. 6. 24.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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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000913 밀 한 되

방문을 열고 책 보따리를 휙 내던지면서 어머니께 ‘능월’에 간다고 조르는 내게 어머니는 밀 한 되를 조그마한 자루에 넣어 주시며, 소 잃어버리지 않도록, 신신당부하신다. 핑계는 소 먹이러 가는 거지만 그 실은 과수원에 과일을 사 먹으러 가는 꼴이 되는데, 어머니로선 우리 집 마당 구석에 진종일 매여 있는 소를 안쓰럽게 생각하든 차에 내 청이 먼저 있으니, 아버지의 눈치를 오늘 저녁만큼은 보시지 않아도 되겠다 싶으셨는지 반색하신다. 모처럼 모자가 의기투합한 꼴이 되었다.

‘정환’이는 이미 ‘강터 고개’를 향해서 나섰을 테니 내 마음이 급하다.

‘강터 고개’까지는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소등에 타지 못한다. 새벽에 일소 재촉이듯이, 뛰다시피 달려가는데, 소란 놈은 큰 눈을 흘기며 ‘요놈의 꼬마가 웬일로 내 기분에 맞추느냐’는 듯, 가볍게 보조를 맞춘다. 그 사정인 것이 남의 눈인데, 힘든 일을 시키면서 사람 같은 것들이 호사나 하려고 한다는 소의 의중을 새기는 인심을 나도 눈치채고 있기 때문이다. 고개에서 두 목동은 만났지만 이미 ‘정환’이는 소에게 길가 풀을 먹이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늘 주린 배 모양 보이는 우리 소다. 게걸스럽게 자꾸 고개 숙여 길가로 가는 우리 소가 안쓰럽다.

각기 재주 대로, 한 녀석은 길 가 큰 돌 옆에 소를 세워 놓은 다음 저는 돌 위에 올라서서 소등에 올라탔고, 나는 언덕 밑에 소를 세워서, 갓 잎은 삼베 바지에 누런 물이 들든 말든, 소야 배가 등가죽에 붙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탔다.

밀 자루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고삐를 잡자니 몸이 균형을 잃어서인지 영 불편하고 마땅치 않다. 밀 자루를 소 앞 뾰족 등에서 양쪽으로 갈라 늘어뜨려 해결하니 그다음은 ‘아! 목동…’이 아닌가. 콧노래는 샛바람을 타고 산기슭으로 더듬어 올라간다. 뒤죽박죽노래니까 그럴 테지. 한동안 떠드니 입이 아플 수밖에. 조용하다.

초여름 햇살이 이마에 쏟아진다. 논두렁 물 고에서 아래 논배미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다시 뒤로 멀어지건만, 소 그림자는 발자국, 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뒤따라오며 흔들거린다. 뒤에 오는 동료 ‘병사’는 조는지 책을 보는지 말이 없다. 옅은 개울을 지나고 낯익은 동네 어귀를 빠져 마침내 과수원 근처에 당도했다. 시오리 길은 족히 되건만 말 없는 소는 꼬마를 믿고 예까지 왔다. 한길에 내놓으면 마냥 그렇게 가기만 하는 소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조금은 미안하고 가엽다.

급한 것이 소먹이인데도 뒤로 미룬다. 우선은 가까운 풀밭에 내놓고는 과수원집을 가는데, 복숭아 철이라고 들긴 했어도 무엇을 얼마나 줄 것인지 궁금할뿐더러 난생처음 곡식을 주고 과일을 사는 흥미가 진하다.

주인아저씨의 대단한 호의로 복숭아를 한 자루나 얻었는데도 아저씨의 말씀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데, 먼 길을 어떻게 어린것들이 왔으며, 얼마나 먹고 싶으면 밀을 갖고 오느냐는 것이다. 둘은 개선장군이 됐다.

수만 년을 물에 씻기고 갈렸으리라. 돌이란 돌이 하나같이 둥글다. 모나지 않는 것은 풍상을 겪어온 이곳 토박이들의 심성을 닮아서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도 모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졌다. 돌과 함께 이곳 민심도 어질고 순박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척박한 모래땅에 거름을 넣고 정성을 쏟아 흙을 만들고 나무를 가꿔서 그 열매가 꼬마들에게까지 주어지고 웃음을 새기는가 보다.

나무와 사람이 함께 살아가고 돌과 모래가 초원으로 바뀌는 개울가로 소를 몰고 나가는 ‘두 꼬마 기사’의 얼굴엔 웃음이 조각된 듯 다물어지질 않았다.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여름을 만들고 대지는 구름을 안아 번개를 튀기는 초여름의 오후, 우리는 구름을 탄 듯 바람을 탄 듯, 마냥 부풀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꼬마 둘은 하늘을 뚫고 오를 듯 하늘을 향하여 한 손을 빙빙 돌려가며 달려갔다.

소는 고삐를 목에다 돌려 매어 들판에 내놓고 둘은 약속이나 한 듯 흐르는 개울가 모래밭 웅덩이에 풍덩 들어간다. 해방된 소들은 자유의 발걸음을 시험하듯 몇 발짝을 껑충껑충 뛰어간다. 코뚜레의 장력(張力)이 없어 허전함을 비로써 느꼈으리라. 머리를 숙이며, 입놀림이 느릿느릿하게 시작된다. 기꺼운 양, 꼬리는 등허리에 채질하고 목에 달린 요령은 감미로운 소리를 멀리 흩어 날린다.

물장구가 지겨우면 모래밭에 올라와 물속의 복숭아를 건져내어 아귀가 아프도록 먹다가 이번에는 옅은 물을 막아서 물길을 돌리고 갇혀 있는 물고기를 잡는데, 해는 공중에 매달아 놓았는지 마냥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소는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고 있는지 도무지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이것이 화의 근원이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산 밑의 마을 마을에선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큰 산 뿌리가 검게 물들어질 때 제정신이 들었다. 복숭아 건질 생각은 다음이고 소를 찾는 일이 다급하게 된 둘은 달리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높은 둔덕에 가서 조망하는데 ‘정환’이네 소다. 그런데 우리 소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으니 오뉴월 천둥에 개 뛰어들 듯 껑충껑충 뛰어다닌다. 한참 만에 찾기는 찾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소고삐가 풀려서 그 끝이 해당화 그루 밑에 칭칭 감겨서 한발도 안 되게 남은 고삐 줄은 미련한 소의 전형을 말하듯 하고, 입 주위는 온통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중머리 깍듯이 빤빤하다. 발버둥은 또 얼마나 쳤는지 땅을 갈아엎은 듯, 배설물과 뒤범벅되어 몸부림의 흔적이 역 역하다. 얼마나 나를 원망했으랴!

배는 아직 풍선에서 한참을 못 미치는데 이 노릇을 어떻게 하나 땅거미는 지고 동무는 재촉이고 엄마와 아버지 얼굴이 번갈아 그려지고 발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발을 구렸다. 소의 의향대로 맡기자. 지켜보는 내 눈앞에서 소는 풀을 뜯는 둥 마는 둥 부지런히 걸어가서 콩밭에 이르러서 콩 포기에 입을 대지 않는가. 예전엔 이럴 때 소를 매질하여 그 뜻을 알리련만 이번엔 머뭇거려진다. 워낙 급한지라, 소도 포기를 뽑으면서 달려들고 뽑히지 않는 포기는 잎을 싹둑싹둑, 잘도 잘라먹는데도 나는 먼 산만 바라본다.

나무포기에 감긴 고삐 하나 풀지 못하는 소에게 해방과 자유는 주어서 무엇 하나 싶다. 소는 사람인 것이고 사람에 속해 있을 게 분명하다.

아마도 그 콩밭은 몇 포기가 뽑혀서 이 빠진 것처럼 됐을지는 몰라도 순을 따준 우리 소의 덕으로 꽤 많은 수학을 올렸을 것이라는 내 변명을 해보고 싶지만, 그래도 곡식을 먹는데 외면한 내 양심은 살아있었는지, 오늘에도 그 상흔이 남아 있다.

어둠을 뚫고 돌아가는 우리는 배부른 소등 위에서 가랑이가 더 벌어졌다. 그리고 우리의 입도 한껏 벌어졌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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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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