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비(堆肥)

외통프리즘 2008. 6. 2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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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비堆肥

1633.001215 퇴비堆肥

검은색이 바래고 바래서 더는 바랠 수 없다는 듯, 아예 회색이 되어버린 무명 천 책보자기에 책일랑은 제쳐놓고 몇 권의 공책만 둘둘 말아서 한쪽 끝을 한쪽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다. 그리고 다른 쪽 끝을 다른 쪽 겨드랑 밑으로 빼어 양끝을 앞가슴 위에서 불끈 묶는다.

 

한결같은 줄서기 움직임으로 등교하는, 전쟁 중 우리들의 하루가 시작하는 아침이다.

 

학교 옆집의 해묵은 밤나무 그늘이 아직 운동장의 한 구석을 차지한, 한여름의 이른 아침이다.

 

오늘부터 풀 베는 날이다. 양손에 한 다발씩의 풀단이 들려서 개미같이 모여든다. 이름 하여 퇴비증산. 전쟁으로 지친 그들에겐 고사리 손으로라도 풀을 베어 모아야 하고, 풀베기를 독려하며 어린이 특유의 순종심을 활용하여 그들이 바라는 국민일체성을 홍보하려 든다.

 

정문을 통과하여 가장자리의 퇴비 더미까지 몇 번이나 놓았다 끌고 가면서, 풀단을 가져오느라 힘겹게 움직인다.

 

쌓을 수 없을 높이 까지, 부락(행정단위동네)끼리 따로 쌓아 어느 부락이 앞섰느냐를 경쟁 시켜서 등위를 정하여 치사하는, 먼저 쌓기 내기가 심사 기준이다.

 

자연스럽게 어른들께 불을 붙이는 계책에 집집이 말려든다. 애들이나 선생님이나 누구하나 불평하는 이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이렇게 하는 것은 그때의 애 어른 모두의 최선이었음을 알게 한다.

 

지금처럼 비료가 흔치 않아서 그랬을 테지만 철저히 자연적 순환을 신봉하여 증산을 도모한 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좋은 표본이다.

 

자연은 무리수가 통하지 않고 자연은 거짓이 없음을 고금을 통해서 일깨우고 있지만 꾀부리는 인간은 믿으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슬프다. 우리의 눈과 코로는 썩는 모양과 그 냄새가 볼품 없고 고약하지만 자연은 우리와 달라서 새 생명에로의 영양소가 되니 달고 향기로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진리의 샘이다.

 

사람은 사람 기준으로 만사를 판단하고 평가하며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연을 훼손한다. 냄새 나는 것, 썩어서 뭉개지는 것, 이것들 없이는 새싹도 새 움도 없음을 말한다.

 

다른 편에서 말한다. 인간들이 먹는 과일은 식물들의 마지막 배설물이요 퇴물이다. 그들은 우리 인간들을 보고 썩은 것만 먹고사는 이상한 족속이라고 빈정거릴 것이니 교만한 인간은 속 좁은 짓을 자성해야 한다.

 

만물은 음양이 있다 하지 않는가. 크게 적게 실하고 약하게 모든 것은 대칭 되고 상대적이며 배타적인가 하면 융합되고 합일(合一)되는, 이합과 집산의 대립물의 활동연속이다.

 

고리를 이루어 순환하며 축소 팽창하는, 고리의 한 점을 차지하는 인간의 특질은 무엇인가. 이렇게 고리를 선도하는 원동이 인간이길 스스로 터득하려면 적어도 썩어서 냄새나는 것을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의 탄생이 다른 쪽에서 보는 썩고 냄새나는 탄생이 아닐 것을 약속 받는 것이다. 그러기에 퇴비는 썩는 것이 아니라 비단같이 결 고운 새 것으로, 냄새나는 고약한 것이 아니라 향내 나고 달콤한 진미의 양식으로 인식되는 날, 우리의 미래는 약속되는 것이다.

 

그 후 퇴비의 유효성을 잊고 지내면서도 그때의 우리들의 행동은 이래저래 긍정돼서, 그나마 인간으로써 위안이 된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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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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