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까리가 무슨 용도에 닿는지 모르지만, 어린이들을 풀어서 빈터란 빈터는 한 뼘도 남김없이, 모조리 아주까리로 뒤덮도록 했다.
집 앞마당은 사람이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발붙일 자리만 남기고 모두 아주까리를 심게 하고 아낙네들만 들락거리는 뒷들에도, 담 밑에도, 한 길가도, 철길 둑에도, 밭둑에도, 학교 운동장에도, 산기슭에도, 자는 자리와 걸어 다니는 길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주까리를 심도록 우리네를 졸랐다.
그렇게 되니 보이는 것은 아주까리고, 말 붙임은 몇 되를 땄느냐고, 눈치는 어디에 빈 땅이 있느냐는 짓이다. 가히 아주까리 홍수다.
아주까리기름과 동백기름에 얽힌 우리네의 많은 사연은 멀리 사라지고, 한여름에 아주까리 잎으로 모자도 만들어 쓰고 아주까리대로 물놀이 대롱도 만들어 노는 우리들의 장난감만은 풍요(?)했다.
아무도 지금 아주까리를 두고 시비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 하고 싶다. 내 나이 먹으리만큼 먹었으니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텐데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원통하다. 지났어도 알고 싶다.
먼 길가는 이의 우 장 갖출 필요 없이 아주까리 길 따라서 성큼성큼 가노라면 해를 쫴도 걱정 없고 비가 와도 걱정 없네!
고갈 모자 되었다가 딸기 따서 받아온들 지천인 것 아주까리 뉘 뭐라 할 것인가? 진드기와 아주까리 왜 이리도 닮았는고
진드기는 소의 피부에 붙어서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다. 우리네 삶은 시대에 따라서, 조류(潮流)에 따라서 수없이 이지러지고 할퀴어 왔다. 이토록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도, 순박하기만 한 우리가 아주까리 호롱불을 그대로 이어가는 느긋함 때문인데, 이를 못마땅히 여긴 그들은 한 치의 땅도 남김없이 개간함으로써 아주까리가 넘쳐나 진드기로 닮게(?) 했다.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