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9.001213 연필 2
연필의 다양성을 모르면서 연필을 말하려고 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무척 긴 세월동안 연필로만 긁적거렸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이 내 머리에만 남아있는 그림을 정리할 겸, 이 연필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질을 해 볼 참이다.
필시 연필은 개화이후에 들어 왔을 것이고 일본의 신교육 정책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리라고 여긴다. 그 유래를 제쳐놓고 나와 얽힌 것, 생각나는 것을 말한다면 내 머리는 여기서 맑고 정연하게 될 것 같다.
연필이 아무리 정교하게 잘 다듬어져 있어도 그것이 공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서는 연필의 깎기나 다듬기가 아무 소용없는, 겉치장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연필이 가지런하거나 지우개가 제자리 있으면 반드시 공부를 잘한다고만 말 못함을 뜻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글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지 몸을 달련 하는 것이 아니니까 연필이 하나도 필요치 않은 애가 으뜸가는 머리요 공부도 잘 하는 애일 것이다.
지우개가 손톱만 하고 몽당연필 한 두 자루가 있을 뿐이고 그 연필의 심조차도 나무에 파묻힐 듯이 닳아 들어간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필통에 담아 다니는 애가 꼭 반장을 했다. 그러니 그 애를 보고 연필노래를 시킨다면 필시 낙제 일 것은 틀림없다. 왜냐 하면 연필을 많이 다루질 않았으니 성질도 성향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되도록 연필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고 선생님의 입이 연필과 공책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름하여 '필통공동(空洞)형'이다. 이러고 보니 나는 그와 대조되는, 필통 만재(滿載)형이다. 송곳처럼 뾰족한 연필을 가득히, 그것도 키순으로 가지런히 놓는 나의 공부는 늘 처지며 월등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정의하면 연필을 얼마나 소모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덜 썼느냐가 재목의 좋고 나쁨의 판별기준이 된다. 단 성적 하위의 집단은 예외다.
연필타령을 하는 김에 다 해버리자.
타령은 원래 연장을 나무라는 어설픈 목수가 제격이니 내가 해야 어울린다. 연필의 구조는 흑연 심과 심을 두른 나무로 된 살이 있다. 이 나무가 두 쪽으로 붙여져 있는데, 옛날 연필은 흔히 한 쪽의 나뭇결이 다른 쪽 나뭇결과 달라서 칼을 대고 깎으면 심 쪽으로 깊이 패여 들어가는 쪽이 있는가 하면 밋밋하고 비스듬히 잘 깎이는 쪽이 있다.
보기에 언청이 같아서 고르게 한답시고 또 깎고 다시 깎고 하다가 몽당연필이 돼서 마침내 쓰레기통행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연필은 두 쪽 나무가 서로 궁합이 안 맞아서 연필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엇가고 빗가면서 쓸모를 잃고 그 생을 마쳤다.
만약 연필심 안쪽으로 파고드는 나무가 양쪽에 같이 붙여져 있었다면 그 수명은 달랐을 것이 자명하다. 또 그 반대로 비스듬히 나가는 나무끼리 붙여졌다면 아마도 장수를 누리며 제몫을 다했을 것이다.
연필이 그대로인 채로 쓰이는 길이는 절반을 넘을 수가 없는데 이를 무리하여서 꼭지를 끼우고, 종이를 말아 모자를 쓰게 해 끝까지 닳도록 썼다고 해서 누구에게 도움이 됐는지 따져보고 싶은데, 이것이 복잡하다.
연필을 끝까지 쓴다고 할 때를 생각해 보자.
우선 연필을 가지고 있는 애의 입장에서 보면 여러 가지 부속을 붙이며 신경 쓰는 만치 시간이나 정신을 빼앗기는, 물질 이외의 손해를 보게 되지만 조달하는 부모의 입장은 경제적 이득을 보고, 생산자는 그만큼 이문을 더디게 보니 이 또한 절반만 쓰고 버리는 때보다는 손해를 봤다.
결국 이득 보는 쪽은 한사람이고 손해를 보는 쪽은 두 사람이다.
그런데 기왕의 미덕은 몽당연필에 꼭지를 붙이거나 꽂아서 오래 쓰는 쪽이었다. 여기까지 본다면 반 쓰고 버리는 편이 개인 간의 이해 균형상 옳게 보인다.
그렇지만 사회를 한 단위로 따진다면, 연필 한 자루를 만드는 자원가치와 부가되는 가치를 합쳐서 보면, 당연히 몽당연필이 되도록 쓰는 것이 또 옳은 것으로 된다.
여기서 다시 정리를 해 본다면 몽당연필이냐 반 토막 연필이냐의 논란의 초점은 물질적인 차원이냐 그 밖의 정신적인 차원이냐를 가름해야 하는 것이 된다. 왜냐 하면 반 토막으로 버릴 때의 사회적 손실은 그가 얻는 시간과 정신적으로 얻는 이득, 즉 다른 공부나 일을 할 수 있는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연필로서의 아름다움은? 보기 좋을 정도의 닳기는? 칠 부의 길이가 가장 안정되고 손에 넣고 싶은 크기이다. 이 길이에 못 미치면 어느새 숨이 조이는, 답답함 마저 느껴진다. 삼부(三部)가 닳은 연필의 쓰임새는 삼부(30%)가 남은 몽당연필에 오부(50%)의 꼭지를 끼워 쓰는 것이나 같지만 보기는 전혀 다르다.
이것이 인간 심성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친다고까지 생각하면, 또 다른 감회에 싸인다.
아무려나, 내가 갖고 있는 연필의 기장은 칠 부의 깎기로 새겨져서, 영 지워지지 않는다. 그나마 내 삶도 칠 부의 삶이나마 되었으면 오죽 좋으랴만! 삼부의 연필인 것 같아서 괴롭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