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품평회品評會

1645.001225 품평회品評會

지금은 어디에서도 들어볼 수 없는 낱말이다.

 

말도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인지, 품평회란 낱말은 퇴장 된지 오래다. 해방과 더불어 없어지더니 이후로는 이런 말을 쓸 기회를 잃어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풍부한 농산물의 공급처를 찾아서 고민해야 하는 새로운 질서의 축은 어린이 놀이 같은 구차한 이 낱말에 사형을 선고했다. 소량생산의 우수 농산물일지라도 대량생산된 농산물의 수적 우위를 당해낼 수는 없었던 터여서 위축 소멸되고 말았다.

 

마치 기계제품이 수제품을 몰아내듯 일시에 쫓겨났다. 그것은 정치인들의 몫이었으니 그들 나라에서 곡식을 소량으로 생산하는 농민의 형편도 우리네와 다를 바 없으리라.

 

나는 아직도 이 낱말에 정감이 간다. 할머니와 내 또래의 핫바지 저고리를 연상시키며 아득하기만 한 옛날로 금방 데려가는 마법을 지닌 말이기 때문이다. 시골 학교라서 그랬는지, 해마다 거르지 않는 품평회는 우리 할머니의 손자사랑 공로심사장으로 되어버렸다.

 

할머니의 머릿속엔 해마다 그 해의 가을 품평회를 염두에 두신 작물 가꾸기가 잠재했을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가 추천하고 매만져주신 곡식은 그때마다 좋은 평을 받았다.

 

색깔을 검은 것으로 하는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았다. 할머니는 늘 검은콩 중에서 우선 우량 콩을 고르신다. 이를 보자기에 몇 알씩 싸서 정성을 다해서 깨끗하게 닦아낸 다음 쌀겨를 묻혀서 문지르고, 이렇게 손질한 것을 한데 모아서 다시 깨끗한 천으로 문지르면 윤기가 나고 굵어 보인다.

 

뿐 아니라 탐스럽게 돼서 다른 출품 콩보다 월등하게 좋아진다. 이렇게, 좋아 보이는데 치중할 뿐이고 과학적인 측정방법이 아직 없던 그 시절엔 사람의 눈이 평가의 기준일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할머니의 마음과 할머니의 눈이 심사관의 눈이 되는 격이다. 해서, 할머니의 손자인 나는 늘 상위(上位)에 오를 수 있는 농산물을 출품하게 되고, 이 결과를 전해 듣는 할머니는 크게 기뻐하셨다. 그해의 시름을 딛고서 이룬 결실에 보람을 얻으셨다.

 

 

모든 것이 넉넉지 않았던 그때엔 일정한 그릇이 없어서 도화지로 나직한 갑을 만들어서 곡식을 담아 진열하고 있었다. 교실을 비우고 책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 종이를 깔고 거기다 품종별로 늘어놓았으니 이제 교실은 화려한(?) 전시장이 되고 정성이 넘치는 볼거리장이 되었다.곡식만을 전시하는 품평회장을 마련했으니 얼마나 초라했을까 싶다. 또 몇 사람이나 이런 전시실을 찾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머리가 엇질 하다.

 

차라리 눈을 감고, 그때로 돌아가서 호젓이 농사짓는 집 자식들만의 잔치가 되어서, 웃고 흐뭇하고 아쉬워하며 다음해를 기약하는 그런 품평회를, 생각만이라도 해보고 싶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나를 꽉 채워서 즐겁게 하니, 잠깐이라도 눈감고 둘러보고 싶다.

 

눈을 떴다.

 

품평회 입상소식을 들으시고 이빨 없는 ‘하회탈’의 함박웃음처럼 기뻐 웃으신 우리할머니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아서 나는 옷섶을 여민다. /외통-



'외통프리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얼굴  (0) 2008.06.28
검도  (0) 2008.06.27
아주까리  (0) 2008.06.26
퇴비(堆肥)  (0) 2008.06.25
연필2  (0) 2008.06.25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