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로 나타나는 모두는 내부의 표징이듯이 우리가 쓰는 글도 그 사람의 성정을 잘 나타낸다고 보아서 흔하게 필적이라고 불리면서 마치 발자국으로 그 사람의 키라도 재듯이 이러쿵저러쿵한다.
어깨를 낮추어 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깨를 높여가며 쓰는 이가 있다. 어깨를 낮추는 이의 글씨를 모아보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빗 그어지고 어깨를 높여가며 쓰는 글을 모아놓고 보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올려 그어진다. 이런 것이 사람의 성정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보면 퍽 재미가 있을 것 같은데 과문으로 알지 못한다.
대체로 크게 쓰고 작게 쓰는 차는 성격 탓으로 보고 싶다. 물론 같은 시력을 전제로 가능한 것이다. 속이 좁고 치밀한 이는 글도 작고 빽빽하다. 그러나 헤프고 대충대충 사는 사람의 글씨는 크고 벌어진다. 아마도 마음의 일단이 손끝을 통해서 붓끝을 지나서 종이 위에 전달되기 때문이리라.
어떻게 썼건 한 가지 방법으로, 자기의 마음을 스스럼없이 그대로 박아낸다면 그 글씨는 하나의 틀로 되면서 짜져서 그 형이 독특하게 짠 융단 같아서 보기에 아주 좋다. 그 체가 크든 작든 성글든 배든 예외 없이 아름답다. 그래서 그 사람의 외곬으로의 의지를 나타내서 더욱 돋보일 따름이다.
그러나 내가 한글을 처음 접한 해방 후의 내 글씨는 본을 받을 책도 없거니와 좋고 나쁜 것을 재는 잣대조차 없던 때, 있어도 분간할 수 없는 때여서 나름의 틀을 짜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느라 아직도 내 체를 마련하지 못했다.
좋은 본을 만들려고 손목을 종이 위에 붙여서 움직이지 않고 써보다가 어떨 때는 아예 손목을 떼고 팔꿈치만 바닥에 붙이고 손은 허공에 띄어서 써보기도 하다가 또 마땅치 않으면 이번에는 새끼손가락을 종이 위에 받치고 써보기도 한다. 그때마다 특유의 글씨체가 되곤 했는데 보는 내가 싫어한 까닭을 아직 알 수 없다. 이것이 좋아 보이면 이것으로 쓰다가 저것이 좋으면 저것으로 쓰다 보니 틀은 헝클어지고 공중에 뜬 체가 되고 말았다.
고집을 부리거나 다르게 흉내 낼 수 없어서 한 가지 필체로서 끌어왔다면 모름지기 내 체가 만들어지고 필적이 나를 말하는 대변도 할 것인데 아직도 그렇지 못하니 언제 바로잡힐지 요원하여 스스로 한심하다. 이렇게 보면 활자화된 컴퓨터가 내겐 대환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야말로 남의 이목을 의식해서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을 쓰느라고 내 체를 못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성정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 자못 심각하고 부끄럽다. 내 성정을 지금 고치거나 맞추어서 새로 삶을 꾸릴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예까지 이렇게 됐다고 하는 생각으로 정리해 볼 뿐이다. 잘 쓰려고 할 필요 없이 남이 알아보게 또렷이 쓰되 한결같은 마음으로 쓰면 될 것을 그랬다.
글의 내용은 내 의사이지만 글씨는 내 성정의 그림자인 것 같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