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등기

외통프리즘 2008. 6. 2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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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2.010112 환등기(幻燈器)

우리 반 교실에 우르르 몰려온 윗반 애들은 저마다 손에 의자가 한 개씩 들려 있었다. 이들은 통로의 빈 곳에 의자를 차례로 놓아 앉으며 채워 나갔다. 통로와 앞뒤 빈 곳을 채운 애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작은 교실은 부풀렸고 창마다 부옇게 김이 서려서 좁고 답답했다.

낯선 두 분이 징검다리 건너듯 애들 머리 위를 제치고 앞에 자리 잡고 손에 들었든 무엇인가를 내려놓고는 매만지고 있었다. 둘은 같은 색의 ‘각반(脚絆)’을 쳤고 옷은 군복같이 두껍고 질겨 보였다. 머리는 우리처럼 빡빡 깎고 있으나 그 눈빛은 벽이라도 뚫을 것 같이 빛났다. 흑판 위에 흰 포장이 쳐지더니 담임선생이 들어오고, 창은 검붉은 포장이 쳐졌다. 흑판 위엔 갖가지 그림들이 그려지고 그림마다 따르는 설명이 곁들었다.

배경은 미국이다. 눈알과 머리칼이 새까맣고 얼굴색이 누런색이며 체구도 작아 보이는 것이 동양 어린이 같다. 이 어린이가 남의 집 과수원 길을 걸어가다 떨어진 사과를 주워서 먹었는데, 몹시 배고팠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디서 보았던지 코가 주먹만 하게 크고 머리와 눈이 노랗고 키는 장대같이 큰 사람이 이 애의 덜미를 잡고 들어 올려서 노려보는 것이다. 어린이는 먹든 사과를 땅에 떨어뜨리며 발버둥을 치지만 어림없다. 여러 가지로 설명하면서 떨어진 사과임을 알리지만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말할 필요 없다는 듯, 발버둥 치는 아이를 끌고 과수원집으로 갔다.

어린이를 밧줄로 꽁꽁 묶어서 의자에 앉히고 벌겋게 달군 인두를 꺼내서 이마에다 지져 새긴다. ‘누스비도’(盜人; 도둑) 라는 이마의 글자를 보는 교실의 어린이들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엎드렸다. 하나, 낯선 사람의 외침은 단호했다.

‘귀추꾸 베이에이’, 뿔 달린 짐승 같은 미국 영국(귀축미영: 鬼畜米英) 놈이라고 외치며 우리에게 같이 외칠 것을 청하니 교실은 폭발했다. 두 반의 어린이가 한 교실에 모인 것도 기적이려니와 이들의 함성은 유리문을 들썩이고 천장을 흔들었다.

어린이에게 심은 적개심의 극적 효과는 이렇듯 포만(飽滿)됐고 전쟁에 대한 당위성도, 왜 부모 형제 오빠들이 징용되어 가야 하는지를, 적어도 이날 교실에 있었던 어린이들에겐 의심의 여지 없이 심어 주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그때 그 교실의 아이들은 가치 기준이, 이들의 적이, 이들의 사는 보람이 어디에 있는지를, 몇 번이고 변할 때마다, 찾고 적응하느라 숨죽이고 따라야 했다.

적은 미국서 일본으로, 북쪽은 다시 미국으로 남쪽은 중국으로, 상황에 따라서 남한으로 북한으로 정신없이 변해갔다.

불과 육십 년 사이에 몇 번이고 뒤바뀌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그래도 미치지 않고 제정신을 차리고 찾고, 인식하고, 느끼며, 살아있는 것이 스스로 대견스럽다./외통-

1672.010112 환등기(幻燈器)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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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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