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2.010112 환등기
우리 반 교실에 우르르 몰려온 윗반 애들은 저마다 손에 의자가 한 개씩 들려 있었다.
이들은 통로의 빈 공간에 의자를 차례로 놓아 앉으며 채워 나갔다. 통로와 앞뒤 빈곳을 채운 애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작은 교실을 부풀렸 고 창마다 부옇게 김이 서렸다. 좁고 답답했다.
낯선 두 분이 징검다리 건너듯 애들 머리 위를 제치고 앞에 자리 잡고 손에 들었던 무엇인가를 내려놓고는 매만지고 있었다. 그 둘은 같은 색의 각반脚絆(행전)을 치고 있었고 입은 옷은 군복같이 두텁고 질겨 보었다. 머리는 우리들처럼 빡빡 깎고 있으나 그 눈빛은 벽이라도 뚫을 것 같이 빛났다.
흑판 위에 흰 포장이 쳐 지더니 담임선생이 들어오고, 창은 검붉은 가리개 포장이 쳐졌다. 흑판 위의 흰 포장 ( 布帳) 엔 갖가지 그림들이 그려지고 그림마다 따르는 설명이 곁들었다.
배경은 미국이다.
눈알과 머리칼이 새까맣고 얼굴색이 누런색이며 체구도 작아 보이는 것이 동양 어린이 같다. 이 어린이가 남의 집 과수원 길을 걸어가다 떨어진 사과를 주어서 먹었는데 몹시 배고팠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디서 보았던 지 코가 주먹만 하게 크고 머리와 눈이 노랗고 키는 장대같이 큰 사람이 이 애의 덜미를 잡고 들어 올려서 노려보는 것이다.
어린이는 먹던 사과를 땅에 떨어뜨리며 발버둥치지만 어림없다.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면서 떨어진 사과임을 알리지만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말할 필요 없다는 듯이 발버둥치는 아이를 끌고 과수원집으로 간다.
어린이를 밧줄로 꽁꽁 묶어서 의자에 앉히고 벌겋게 달군 인두를 꺼내서 이마에다 지져 새긴다. ‘누스비도’(盜人;도둑놈) 이라는 이마의 글자를 보는 교실의 어린이들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엎드렸다. 허나 각반 친 낯선 사람의 외침은 단호했다.
‘귀추꾸 베이에이’, 뿔 달린 짐승 같은 미국영국(귀축미영:鬼畜米英)놈 이라고 외치며 우리에게 같이 외칠 것을 청하니 교실은 폭발했다.
두 반의 어린이가 한 교실에 모인 것도 기적이려니와 이들의 함성은 유리문을 들썩이고 천장을 흔들었다.
어린이에게 심은 적개심의 극적 효과는 이렇듯 포만(飽滿)됐고 전쟁에 대한 당위성도, 왜 부모 형제 오빠들이 징용되어 가야되는지를, 적어도 이날 교실에 있었던 어린이들에겐 의심의 여지없이 심겨졌다. 그러나 오늘을 살고 있는 그때 그 교실의 아이들의 가치기준이, 이들의 적이, 이들의 사는 보람이 어디에 있는지를, 몇 번이고 변할 때마다, 찾고 적응하느라 숨죽이고 따라야 했던 것이다.
적은 미국서 일본으로, 북쪽은 다시 미국으로 남쪽은 중국으로, 상황에 따라서 남한으로 북한으로 정신없이 변해갔다.
불과 육 십 년 사이에 몇 번이고 뒤바뀌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그래도 미치지 않고 제정신을 차리고 찾고, 인식하고, 느끼며, 살아있는 것이 스스로 대견하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