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6.001230 장 검
일단의 어린이가 숙직실 옆의 커다란 벚나무 밑에 늘어서서 일본식 옷인 ‘하오리’를 입고 나오는 검객을 맞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가슴을 편 검객은 어린이들을 하나하나 눈빛으로 제압했다.
어린이 누구도 이 검객의 눈을 바로 보지 못했다. 검객의 짧은 머리카락은 하얀 머리 가죽을 당겨가며 하나하나 심은 듯이 곧게 박혀있다. 고슴도치 가시 돋듯 머리카락이 서서 그사이로 희다 못해 푸른색마저 감도는 머릿밑이 선듯하다.
세모로 접은 검은 두건으로 이 머리를 이마와 함께 싸서 뒤에서 질끈 동여매고는 다시 한 번 늘어선 꼬마들을 응시한다. 이번에는 옆으로 비켜서서 오른손이 천천히 왼쪽 허리춤을 향해서 이동한다. 미간(眉間)이 좁아진다.
먹칠한 듯 새까만 양 눈썹이 코 뿌리를 향해서 독수리 내리꽂듯이 비스듬히 박혀있다. 두 눈알은 코 뿌리를 지키려는 듯이 조여들어 두 눈의 흰자위를 넓힌다. 동작은 미세하지만 팔소매는 파르르 떨린다. 악다문 어금니가 턱밑을 밀어내면서 하악골(下顎骨)을 넓혀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얇은 입술은 더욱 얇아지며 한 일자 획을 묵직이 가로 긋는 순간 얼굴 길이는 반으로 줄어들며 째지는 기합 소리와 함께 팔뚝만한 벚나무가지는 두 동강이 났다.
기합소리는 스러지는 나무 가지가 이어받아 부드럽게 마무리했다. 일순에 빼고 자르고 서서히 칼집을 찾아들어 가는 장검을 바라보는 어린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침묵할 뿐이다.
다시 서서히 자기 방인 숙직실로 돌아갔다.
모름지기 그 나무가지는 선생의 키를 넘봤을 것이고 교장은 이를 효과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교육방법이였다. 검객은 몇 년씩이나 학교의 숙직실 한 쪽의 살림방을 이용하며 그곳에서 부인과 함께 발발거리고 다니는 '발바리;개'를 키웠다.
학교의 일직과 숙직을 도맡아하는 선생은 가보처럼 지키고 소중히 다루던 칼을 내 보였고 교육적 목적으로까지 원용(援用)하였다. 그는 수도자적 생활을 했다. 사명감을 갖고 봉직했다. 칼과 같은 성품은 모든 조선인의 살아있는 수신(修身)책 구실을 했고 이로써 학교 구내이면서도 선생이 사는 방 한 칸은 성역이나 다름없이 고고(孤高)했다. 그래서 그 '발발이'의 꼬리가 두 개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누구하나 확인하려 들지 못했다. 아마도 대쪽 같은 성품의 내외는 생활의 중심을 이 '발발이' 개에게 두어서 꼬리장식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이제야 하게 한다.
가랑잎 굴리는 바람소리, 멀리 산짐승 울어대는 소리, 바람 타고 문 열어 내 님 해치는 꿈, 다칠까싶어 잠 설치는 날, 하루 이틀이었으랴! 모든 요소를 한 자루의 장검에 의지하고 몇 년을 외롭게 살았다. 군림하는 지배자의 칼이든 외로움을 달래려 치장하던 말 못하는 강아지든 우리에게 좋고 나쁘고 옳고 그름을 통 털어 빛과 그늘을 일깨우는 여러 가지 교훈을 안긴다.
해방이 됐다.
밤새에 어디론가 사라진 이 검객의 소식은 그로부터 육십 년이나 지난 이즈음 듣게 되어 감회 또한 남다르다.
어둠이 깔린 초가을 밤. 형이 일본에서 돌아와 당숙 댁에 머물면서 나들이를 다녀오는 논두렁길에서 검객, '나까사도' 선생님과 막닥드렸다. ‘자넨가! 자네 담배 가진 것 있나’ 면서 형의 주머니를 더듬었다는 것이다.
형이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담배가 있을 리 없을 것이고 낙심하던 선생은 당숙의 흡연여부를 묻고 즉시 제안을 하드라는 것이다.
‘논두렁 옆의 전주 밑에다가 담배를 가져다가 놓고 가게나, 그러면 내가 그 담배를 가져가면서 그 자리에 가보로 물려받은 장검을 놓을 테니 따로 홀로 나와서 가져다가 잘 보관하게나.’
그날 밤 순차적으로 약속이 이루어졌고 선생은 단지 담배 한 갑에 그의 대대로 이은 선조의 모든 혼을 불살랐다.
형의 스승에 대한 애끓는 마음, 스승의 제자에 대한 신뢰, 이는 국적을 떠나서, 민족적 원한을 떠나서, 인간의 순수성을 얘기하는 무언의 비극적 토막극이었다.
영욕(榮辱)을 함께 한 장검, 군림이 영광과 패배의 치욕을 함께한 검객의 심경은 자기를 묻고 아내를 살리는 인간애의 극치에 다름 아니다.
부인으로 인해서 할복 할 수 없었으리라. 그 장검은 어느 집의 돌담 '곱사' 밑에 숨겼으나 육이오 때 온 동네가 불바다가 되는 바람에 영영 세상에서 빛을 잃고 말았다.
훗날 더듬어 그 장검을 찾아서 검객 ‘나까사도’ 선생의 후손에게라도 전해진다면 그 때에 우리 이웃이 믿음으로 밝게, 함께 번영하지 않겠는지.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