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회든지 참여한 구성원 전원이 어떤 일에 찬성하고 참여하며 생활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들의 이해(利害)와 복잡한 생각이 이를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하여 몰아갈 수 없을 만치 다양한 구조의 사회임을 알아서, 불가능함을 이해(理解)해야 한다. 이런 것을 잊고 그 선봉에 선 이를 탓할 때가 잦다.
사회는 갈등과 파괴로 점진적 향상을, 도모(圖謀)하는 집단에 의한 오도(誤導)로 일시적 침체 또는 퇴보의 길로 미행(微行)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살든 한 시대에 그 중추적 흐름에서 주도 또는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을 매도(罵倒)함은 냉정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을 질타(叱咤)하는 형국(形局)이 돼서 자못 심각하기까지 하다.
얘기를 쉽게 하려, 지극히 작은 집단으로 축소하여서 말해보면, 여기에 한 평화로운 작은 섬에 그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주장침입자들이 그 섬 주민을 회유(懷柔)하거나 위협해서 특산물을 외부로 실어 내려 한다고 하자. 이때 섬 주민은 최후의 순간까지 싸워서 방어하자는 쪽과 몰살당하느니 적절히 협상해서 피해를 보더라도 적게 보는 쪽으로 침입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위기를 넘긴 뒤 다음을 기약하자는 쪽으로 양분(兩分)될 것이다.
누구든지 후자의 의견이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고 할 것이다. 자. 여기까지는 이설(異說)이 없다.
문제는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섬사람 중에 누구인가 앞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섬사람들의 재산을 덜 축내도록 발 벗고 나선 사람의 평가와 예우일 것이다. 앞의 의견 즉 끝까지 싸움을 주장했든 편의 사람은 물론이고 뒤엣것 즉 회유를 받아들여서 적게 빼앗기는 쪽을 찬성하고 주장했든 사람들까지 모두가 이 일의 중심적 역할 내지는 동조한 사람들에게 지탄(指彈)의 화살을 퍼붓는 일이 반드시 생긴다는데 우리의 생각을 머물게 해보자는 것이다. 지탄받아서 옳은 일인가, 그럴 수는 없는 일인가.
한 일의 결과에 상관없이, 그 사상(事狀)과 관계없이 어떤 교훈을 얻어 낸다는 데서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심적 인물이 없었어도 누군가 대역을 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보면 오히려 그가 정당한 예우를 받아서 마땅하리라고 본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대문명 사회에서나 흘러오는 과정의 역사 속에서 온통 널브러져 있는 실상이다.
긴 칼을 찬 ‘순사’의 입회하에 소방 연습한답시고 ‘구장’ 집 마당에다 짚 낟가리를 만들어서 불을 지르고는 종을 치고 사이렌을 울리고 ‘애국(愛國) 반’을 동원하고 한바탕 난리를 치르는데, 이것을 지켜보는 꼬마. 내 눈에 비친 구장의 초조하고 사색이 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아직도 그 ‘구장’이 측은하다.
불붙인 짚 낟가리 짚이 사비고 속에 괸 장작이 드러나건만 ‘애국 반’의 반원들은 나타나질 않는다. 순사부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순사부장’의 눈치를 보랴, 동네 사람들이 들고, 이고 오는 물그릇 보랴, ‘구장’의 목 고개가 도리질한다. 오는 이마다 좀 큰 그릇에다가 물이라도 가득가득 담아왔으면 좋으련만 손바닥만 한 개숫물 그릇을 들고나오는 이가 없나, 물동이를 이고 느긋하게 한 손에 두레박을 들고나오는 이가 없나, 볼만하다.
한낮의 불놀이는 ‘구장’ 집 머슴이 홀로 차리고 홀로 불 지르고 홀로 불 끄고 홀로 마감했다. 여느 집의 여인들은 그저 ‘구장’ 집 마당만 밟고 지나간 꼴이 된다. 구장은 ‘순사부장’을 모시고 사랑으로 드린다. 어떤 평이 나왔는지 보나 마나다.
연기는 모락모락 돌담을 넘어 밤나무 위로 기어오르고 도망갔든 참새 떼가 다시 모여들면서 재잘거렸다.
구장을 보는 눈은 ‘순사부장’의 눈이 다르고 동네 여인들의 눈이 다르고 꼬마, 내 눈도 달랐다. ‘구장’님도 매도의 대상인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외통-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