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도덕을 이해하기엔 까마득히 어린 우리에게 그 선생님은 엄청난, 그 실 엄청난지도 몰랐지만, 그의 독특한 방법의 가르침이 평생을 그 동그라미를 생각하며 살게 하는 나로 만들었다.
해방을 맞은 우리의 허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채워주려고 갖은 방법을 찾고 힘을 다한 그때의 교단은 누구나 사명감에 못 이겨 자기의 몸을 불사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몸에 맞건 안 맞건 그건 나중의 일이고 우선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입혀주어야 웅크리지 않고 떨지 않을 것이라는 일념이었다.
그 시절의 우리 눈에 비친 교실은 드넓었다. 천장은 까마득히 높고 흑판은 동에서 서로 해가 돋고 넘는 너비만큼, 고개를 돌려야 이 끝에서 저 끝을 볼 수가 있었다.
어깨를 축으로 팔을 곧게 펴고 다섯 손가락으로 분필의 뿌리 깊숙이 잡고 잡아 돌려서 흑판 가득히 동그라미를 꽉 채워서 그렸다. 분필은 통에 던져지고 입이 불을 뿜는다.
윤리와 도덕의 테두리를 말하고 이 도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잃는다는 것이다. 다시 흑판 위에 삼 강과 오륜을 적고 장황하게 우리 귀에다 대고 꽹과리를 치더니 이번에는 같은 크기의 동그라미를 그리되 한쪽으로 조금 벗어나 초승달 모양의 그림이 왼쪽은 먼저 그린 동그라미의 안쪽에, 오른쪽은 먼저 그린 동그라미의 바깥쪽에 생기게 그리고는 또 흑판을 두들기고 눈을 부라리며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다.
두 번째 그린 동그라미는 법률이라는 테두리이고 이 테두리에서 먼젓번 동그라미를 벗어난 것을 중점적으로 설명하는 선생님의 태도는 자못 도전적이다. 법률은 도덕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던 그 동그라미를 하루에 한 번은 보고 들어야 했다. 우리끼리의 선생님 별호는 ‘동그라미 도덕 선생’이다. 이후 그 선생님의 이름은 ‘동그라미’고 그 동그라미는 우리 누구에게나 기억됐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새겨있을 것이다.
그 무렵 나에게 들려주신 아버지의 얘기 한 토막이 이 동그라미와 대조되고 함께 떠오르며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다.
한 농부가 자기 아들의 친구 사귐을 책망하며 술 끊기 명하지만, 아들의 변(辨)이 친구의 의리를 앞세우므로 술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여 아들에게 보여 주려 했다.
어느 날 밤, 돼지를 잡아 거적에다가 둘둘 말아 지게에 얹고서 아들에게 지운 다음 ‘이는 돼지가 아니라 지금부터 사람이니라, 우리 집에 오신 손님인데 말다툼하다가 그만 이 지경으로 됐으니 이를 자네와 의논해서 어떻게 하려 하네!’ 하며, 친구에게 이 시체를 나와 같이 처리하도록 청하는 것으로 정하고, 아들이 먼저 돌기로 했다.
아들이 이 지게를 지고 절친한 술친구에게로 갔다. 아들의 거동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아버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들이 친구를 문밖에 불러내어 거적에 싼 시신을 보이며 의논할 것을 청하자, 친구는
‘누구를 죽이려 하느냐?!’며 문을 홱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아들은 이 순간 이 친구는 술자리가 모자랐구나, 하고는 돌아서서 다른 친구한테 가서 같은 방법으로 하소연하지만, 이번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들어가 역시 문부터 걸어 잠갔다. 세 번째 친구의 집에 갔지만 허사였다. 그 실 아들의 절친한 술친구는 두 번째 친구였으니 이제 어딜 간들 받아줄 친구는 없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 아뢰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더 절친한 친구가 없느냐고 따졌다. 아들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먼발치에서 숨어 따라오면서 어떤 친구가 진정한 친구인지’를 똑똑히 보도록 했다.
지게를 바꾸어 진 아버지가 이웃의 아버지 친구에게 가서 사람 죽인 사정을 얘기하자 그 아버지 친구는 신도 신지 않고 달려와 부추기며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인 다음 ‘어떻게 하다가 실수했나?’라며 우선 지게를 벗고 방에 들어가서 자초지종을 들으며 얘기하자며 방 안까지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갔다. 이를 지켜본 아들은 하늘을 보고 길게 한숨지었다.
방안에서 박장대소의 소리가 들렸다. 아들이 불려 들어가고, 이웃을 청하고 밤새도록 돼지고기를 나누어 먹는 술자리가 마련됐다. 싸서 나누어주며 감사했다. 즐겼다.
이 경우에 동그라미 안의 도덕과 그 동그라미를 벗어난 다른 동그라미의 벗어난 초승달, ‘붕우유신(朋友有信)’과 ‘죄형법정(罪刑法定)’의 테두리를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나다. 그때의 그 동그라미를 보고 익힌 우리 모두의 생활은 누구나 반뜻했으리라 믿는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