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준 이가 없는데도 누군가의 선창으로 곧잘 부르며 산기슭까지 다다랐다.
들과 솔밭을 건너 멀리 바다가 보이는 산등성에 이르러 굽어보니, 세상은 점점 작아지고 하늘은 점점 높고 산은 점점 커 보인다. 흙이라기보다 모래를 다져 빚은 산, 뿌리를 내릴 수 없어서 허리가 꼬부라진 소나무, 바위틈을 비집고 틀어 올린 용트림 나무, ‘기묘한’ 산임이 틀림없다.
모래 바위를 오르는 산행은 미끄럽고 위험하다. 바닥이 모래 같고, 바닥이 바위 같아서 잘못 디디면 모래가 바위 위에서 구르면서 우리의 발바닥을 간질이며 몇 발짝 뒤로 물려 미끄러지며 밀려 내려가게도 된다.
산등성에 이르러서는, 골패인 길에 넷 손발이 다 필요하다.
헐떡이며 두 시간쯤 올라 정상에 이른다.
하늘이 물을 담아 두었다가 가뭄에 비를 내리는 솥이 백 개나 있다 해서 ‘백정봉(百鼎峰)’이다.
지름이 약 일 미터, 깊이가 약 칠팔십 센티미터나 되는 웅덩이들이 올망졸망 널려있다. 이런 것이 산꼭대기의 ‘너레 바위(넓은바위)’ 위에 백 개가 넘게 흩어져 박혀있다. 그래서 이 산은 신령한 산이고 부정을 탄 사람이 오르면 신령이 노하여 바람과 비와 천둥 번개를 내린다며, 먼저 이웃과 친목하고 등진 사람과는 화해하고 올라와야 한다는 것이다.
집채 같은 바위틈에다 조고만 하게 돌로 다듬어 집을 만들고 문을 만들어 달았다. 그 문을 열고 정성을 담은 돈을 놓으면 좋은 일이 있다고 하여 누구든지 이곳에 오른 사람은 얼마간의 돈을 놓고 가게 마련이다.
한데 이 돈의 임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무서워서 손을 대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람 소리만이 귀를 울린다. 이곳 바위는 신발을 잡아당기듯이, 달라붙는 특이한 바위라서 미끄러지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잘못 디디면 가마솥의 물속에 발을 헛디딜까 늘 조심하고 있어야 한다. 이곳에선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없고 고함을 치는 사람도 없다. 마치 하늘나라에 온 것같이.
솥 안의 물이 마르거나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 이곳에다 제물의 피를 바위에 바르고 제사를 지내면 사흘 안에 바위를 씻으려고 비를 내리고 백 개의 솥에다가 물을 채워 넣는다는 것이다.
신묘한 바위 솥을 만든 하늘의 능력을 경외(敬畏)하여 몸을 사리고 말도 줄이고 행동도 삼가는 이곳, ‘백정봉’이 내게 준 영험(靈驗)을 고이 간직하고 평생을 살고 있다./외통-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