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우리 인간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세상 어느 한쪽에서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음악이 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도 증명이 된다.
가령 골똘한 음악 애호가끼리도 그중 한 사람이 세상사에 얽힌 심각한 일로 해서 당장 해결을 보아야 하는 어떤 일을 구상하려 하고, 함께 자리한 다른 한 사람은 그날의 당면한 어떤 일을 자기의 희망하는 바에 따라, 자기 마음에 들게 이미 해결을 보고 나서 자축의 의미를 담아서 음악을 감상하려고 하던 터에, 우연히 어떤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단순히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둘이 이전까지 좋아했든 곡을 감상하도록 한다면 그중 세상사에 골몰하는 사람은 그 곡이 과연 명곡으로 살아서 들릴 것인가 아니면 굉음으로만 들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이라도 달라지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또 곡이 장송곡과 같은 장엄한 곡이라면 둘 중 한 사람은 분명 다른 감정적 변화를 나타낼 것이다.
이것은 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이 순수(純粹)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소양(素養)을 갖추었음에도 이럴진대, 날 때부터 음악적 재능, 그 실(實) 다른 것도 마찬가지로, 별로 재주가 없는 내가 음악을 이해하고 감상하고 즐기며 이에 심취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그른 것이다.
한데도 일률적으로 가르치며 이를 배우고 감상하도록 함에 있어서, 비록 창작에 이르지는 않아도 상당한 곤혹(困惑) 당하지 않아본 사람은 모를 일이다.
역시 바탕이 문제이니 그렇다.
이런 가운데, 아무런 기자재 없이 출발하는 학교임에도 음악 과목은 버젓이 들어있어서, 우리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피아노는 고사하고 오르간도 한 대 없는 상태다.
다른 과목은 선생이 모자라 걱정하지만, 용케도 음악 선생은 덜커덕 모셔놓았다.
하니 이론적인 것은 그런대로 배우고 있지만 실제로 익히는 건 요원하다. 그러니까 음악 선생님은 우리보다 더 안달이 나서 야단이다. 어떻게든 전공을 살려서 황량하고 암울한 영혼의 세계를 일구어서 가꾸어야 할, 몸부림은 오직 음악 선생만의 일인 듯, 설쳤음을 그때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우리였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기에 그냥 명색만 음악 선생님이고 겨우 조회 때 지휘봉 잡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시간표대로 때워야 하니까 흑판에다 줄 긋고 악보 그리며 우리에게도 공책에 줄을 그어 베끼도록 하는 음악 시간이다.
그러니 칸칸이 간격 고르게 맞추어야 하고 콩나물의 대가리 줄 맞추는 데 신경 쓰랴, 꼬리 몇 개 달렸는지 신경 쓰랴, 닭 모이 쪼듯 머리를 흔들어 대니 목이 아플 정도를 지나서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다.
한 시간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다음 음악 시간은 이것으로 노래를 배울 참이다.
다음 음악 시간이 다가왔다.
이미 그린, 나름의 악보를 들고는 한 음의 높낮이와 다른 음 사이의 박자를 하나하나씩을 꼬박꼬박 익혀가며 배웠다.
‘이태리’ 민요, ‘싼타루치아’다.
그 시간은 소음과 다를 바 없었다.
다른 날, 이은 시간이 돼서 선생님이 끝까지 불렀고 우리도 됐건 안 됐건, 아무튼 불렀다.
그게 마지막이고 이후 음악은 시간표에서 사라졌다. 그래도 음악 선생은 여전히 건재하셨다.
비록 우리 민요는 아니어도 음악을 전공하신, 그것도 성악을 전공하신 분으로부터 배운 이 노래가, 반주도 없이 어렵사리 배운 이 노래가 우리나라 말로는 처음 배운 노래이고 또 마지막 배운 노래다.
내 평생을 두고 제대로 배운 우리말 노래는 이 노래 딱 하나밖엔 없다. 해서 음치이면서도 유달리 이 노래만은 기꺼하고 사랑하고 있다.
오늘까지./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