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지은 교사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내가 졸업하기 전에 상당한 공사의 진척이 있어서 형체가 드러날 즈음에 고향을 떠났으니까 아직 내 머리엔 미완성의 교사가 있을 뿐이다.
그래도 배움의 터전이라고 애착이 가는 이 교사를 관심 있게 지켜보든 우리는 어느 날 벽돌을 찍는 현장에 우르르 몰려갔다. 다들 관심이 있는 애들이긴 해도 더러는 우리 동네가 아닌 타동네 애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우리 동네 애들이 적극적으로 이 교사에 관심이 많다. 그들의 대부분은 학교의 위상을 겉으로 나타나는 교사의 크기나 화려함으로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위축된 심리를 달래보려는 바람 또한 숨겨져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의 또 다른 욕심은 작은 그림 같은 바람이었다.
과수원 길 건너 넓은 공터에서 시멘트 벽돌을 찍는 아저씨들에게 묻는 말의 첫마디는 ‘몇 층으로 짓느냐’는 물음이고 대답은 ‘모른다’다. 목마른 사람의 심성치고는 너무나 사치(奢侈)한 물음이다.
‘언제 다 지어지느냐’는 물음이라야 될법한데 한결같은 물음이 ‘몇 층’이니, 여기엔 나름의 소원이 담겨있다.
뒤편이긴 하지만 실내에 기둥이 있는 교실은 하늘 아래 없을 것이기에 더욱 면하고 싶은 곳이련만 오히려 층 타령만 하는 어린것들의 순박한 애향심일 것이다. 그들의 머리엔 금전이란 개념은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며칠 지나, 이번에는 쌓는 일을 하는 이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그때에도 간 패거리는 거의 같은 애들이었다. 묻는 애들의 입바른 순서는 전번과 하나도 엇갈림 없이 순서가 이어졌다.
‘단층’을 짖는다는 대답이었고 이 소리를 듣는 애들은 일제히 왜 ‘한층’으로 짖느냐는 볼멘소리를 저마다 내뱉었다. 그것은 여기서 일하는 이들의 몫이 아님을 알면서도, 누구에게라도 항변하고 싶은 우리 모두의 공감이었기에 자연발생적이었다.
그리고 저마다 입으로 모래를 씹듯 한마디씩,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 지르고 교실로 되돌아가면서 뒤돌아보곤 했다. 무척 아쉬운 표정들이었다.
적어도 자기들의 눈으로 보면서 짖는, 자기 모교가 자기 마음에 들도록 지으려는 충정은 누구의 가르침도 누구의 사주도 아닌 순수한 그 고장의 정서에서 우러나는 것이니 집 지으려고 다른 지역에서 온 분들에게는 먹혀들 리도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지만, 그래서 더 우울하다.
내 마음 한구석엔 늘 내가 사는 고향이 다른 고장보다 낫기를 목 타게 바랐는지도 모른다.
우리 동네는 비교적 교통과 문물이 일찍이 발달한 ‘면 소재지’ 중의 가장 인구가 많은 ‘면 소재지’다. 갖출 것은 다 있다. 하지만 그 면모는 그대로 늘 농촌의 한 마을이다.
내가 하루 거르는 ‘학질’이 아니라 매일 같은 시간에 고열이 나는 ‘학질’을 앓을 때 어머니를 따라서 읍내의 한 양방의원에 갔든 일이 있었는데, 그때 본 읍내의 거리가 우리 동네와 다른 것은 단 하나, 이층집이 여러 채 있다는 것이 무척 인상 깊었다.
그때만 해도 높은 곳이면 어디든지 기어오르고 싶은 충동에 날뛰던 때였고 읍내 나들이였던 관계라 그런지 몹시 부러웠다. 나도 이 층에 올라가 보고 싶은 충동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서 다락 같은 이 층이라도 이 층이면, 이 층에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싶은 부러움이 극에 달했던 기억이 머릿속에 자리잡혀 있었나 보다.
그래서 우리 학교의 교사가 적어도 우리 동네의 체모를 바꾸어 주었으면 하는 일말(一抹)의 기대 또한 갖고 있었고,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조그마한 내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내 집이 아니래도 좋고, 비록 거리의 면모가 새로워지지는 못 하드래도 우리 마을에 이층집이 있다는, 그것이 작은 몸집의 나를 무척 기쁘게 했으리라고 본다.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무렵 이층집은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머니의 손에 끌려갔던 읍내 거리가 우리 마을에 조성됐으면 하는, 야무진 꿈이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교사의 꿈은 이미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그 교사는 전란으로 인하여 앞으로 영영 못 보는 교사로, 우리 마을 전체와 함께 불타는 운명을 같이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나의 꿈속에서라도 이층 교사(校舍)로 찬란(燦爛)히 장식할 것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