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을 쳐다보며 동네 길을 걸으면 어김없이 감나무 가지에 걸려있던 달이 나를 따라 움직이다가 내가 머무는 집의 밤나무 가지에 걸치고, 이윽고 집으로 들어갈 때 지붕 위로 따라 숨는다.
그런데 달이 나를 따라 움직이는 것은 달팽이가 제집을 지고 다니는 것처럼 내가 달을 이고 다니는 것 같아서 싫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현실에서, 나를 따라서 교사(校舍)가 움직인다니 실색할 수밖에 없다. 정착민의 아들인 내게 유목민 생활을 닮은 교사 이전이 정서적으로 맞질 않아서 그런지, 반갑고 신나기는커녕 외롭고 허전도 했다.
교사가 내가 하숙하고 있는 고모네 집 근처로 이사한다니 나를 따라 교사가 이전하는 형국이 되어서 사뭇 야릇하다.
중학교도 제대로 갖춘 교사에서 공부하지 못했고, 이곳 ‘고급 중학교’ 교사도 1학년만 임시로 바꾸어 쓰던 ‘여자 고급 중학교’ 교사를 되돌려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옛 농업학교 교사의 주변에 있던 여자 고급 중학교 교사로 이전한단다.
등굣길 걸음으로만 따져 생각하면 나는 백 번 잘된 일이다. 왜냐하면 새로 이사 하는 교사는 내가 하숙하고 있는 곳, 옛날 농업학교가 있는 ‘오릿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제야 제대로 친정학교 언저리로 온 것이다.
교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관계로 새로 부임하는 선생님마다 한마디씩 하신다. 거의 함경도 분이신 이분들은 특유의 억양으로
‘이 학교는 대학 가투 한 게 참 좋지 아입네?’
이런 얘기를 여러 번 듣는데도 내겐 이렇다 할 느낌이 없이 덤덤한 나날이다. 대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니 더욱 아리송할 뿐이다.
오릿길을 걷지 않아서 좋고, 시간이 절약되니, 내 마음 넉넉할 따름이다.
옛날 교사(校舍)는 거의 목조건물이듯이 우리 학교의 본 교사(校舍)도 목조건물인데, 나직하여 정감 어리고 나무숲은 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지워서 청량감을 높여주고 있다.
교사(校舍)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런대로 우리 신입생 1학년이 상급반과 한 울타리 안으로 합친다니 바람직하긴 한데, 우리가 공부해야 할 교사는 이곳에서 큰길을 건너서 또 따로 떨어져서 있다.
운동장을 갖춘 미니 학교처럼 독립된 별관이니, 말이 합친 것이지 여전히 우리 1학년 학생이 본관에 접근하기 쉽지 않고 상급반 학생과 떨어져 있기는 매한가지다. 일
과 중엔 본관 접근에 엄두도 낼 수 없는 곳에 유배돼 있다.
시설물이라곤 달랑 흑판과 책걸상하고, 운동장 한쪽에 있는 교단이 전부다.
그나마 운동장이 있어서 체육 선생님의 시범 운동은 눈이 부시도록 구경했지만, 우리 체육 시간은 늘 땜질이었다. 한 십 분쯤 지나도 시간표의 수업과목 선생님이 안 나타나시면 어김없이 체육으로 둔갑하여 시간 메우기가 시작되니 우리의 공부 열도는 식어 얼어붙는다.
나무 한 포기 없고 그늘막 하나 없는 운동장이니 냉각된 우리의 의식을 물리적 온도로 변환시키기에 충분했다.
‘체육관’은 이름도 뜻도 모르던 때다.
뙤약볕 아래서, 하얀 체육복을 단정하게 입고 가랑이 밑에 발걸이를 만들어서 팽팽한 자세로 도립(倒立)시범을 하는 자태가 너무나 아름답고 그림 같아서, 아직도 선명히 망막에 되살아난다.
역경 속에서도 자기의 직분을 흔들림 없이 지켜가며 우리에게 체육이란 단어의 의미를 알게 한 체육 선생님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미안하고 부끄럽다.
지금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몇 안 되니까 기억 못 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자위한다.
내가 몸담았던 교사 언저리에 나무 한 그루든지 꽃 한 송이라도 있었던들 이런 기억은 깡그리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보통(普通)은 기억에 없고 못 미치거나, 넘치거나, 극한적인 어려움을 겪었거나, 가슴이 터져나갈 기쁨이 있어야 사는 맛을 느낄 수 있고, 이것이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되는 것 같아서, 오히려 교훈적 의미로까지 되살리고 싶다.
뭍을 그리던 섬 처녀의 기분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아직 낯설고 물설다.
이곳에서 내 인생의 푸른 꿈은 실현되려는지. 아버지의 그림자가 마당 한 귀퉁이에서 떠나지 않는다.
글쎄, 하지만 여기가 내 생의 전기(轉機)가 됐음은 자명하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