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남북의 대치가 여러 차례의 작은 충돌로 이어지고 있음을 들어왔다. 특히 개성의 ‘송학산’에서 있다는 소문은 멀리 동쪽 시골 마을에 있는 내 귀까지 들여오고 있었다. 이 무렵 남쪽을 성토하는 구호가 ‘인민학교’ 학생들의 입을 빌려서 ‘인민’을 선동하고, 이 구호는 붉은색 현수막으로 되어서 관공서의 건물마다 드리우고 있었다.
학교의 일상 교과목 수업 시간은 전쟁 이야기로 어수선해지고 교내 ‘민주청년동맹’은 바로 위원회를 소집하였는지, 간부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거리는 해방의 날 ‘팔일오’를 방불케 들끓고 있었다. 그날은 온통 추측만이 난무하는 하루였다.
첫날의 ‘민청’ 회의는 아침 일찍부터 있었다. 열성의 도를 실측하는 좋은 기회가 왔다는 듯이 간부 몇 명이 즉석에서 지원 입대할 것을 동의했다. 불을 뿜는 듯, 토론의 주제는 ‘남조선해방을 위해서 괴뢰도당을 몰아내자’라는 것이고 이 ‘조국 해방 전선’에 ‘유물사관과 변증법으로 무장한 우리 맹원’들이 선두에 서지 않으면, 누가 서겠느냐며, 저마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불을 댕긴다.
이에 앞서서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 선생님 몇 분이 선도하여 지원결의 했으므로 학생 ‘맹원’들은 팔짱 끼고만 있을 수가 없게 됐다.
‘남조선’ 성토의 토론은 몇 시간씩 이어지다 끝내는 학생들 자원입대 결의까지 유도해 냈다. ‘남조선 괴뢰 도당’ 타도를 반복해서 외치고 지원하는 선생님과 학생들이 그 자리에서 ‘군사 동원 부’로 몰려가고서야 폐회되었다.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늘 하던 대로 고모네 집으로 돌아온 내 가슴은 설레기 시작했다. 그들 지원 ‘맹원(盟員)’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적이 착잡하고 침울했다.
고종사촌 누나와 나눈 말 몇 마디가 번개처럼 스치며 머리가 혼란해졌다. 나의 현실적 물음에 누나는 언제나 내 의문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빛이 뚜렷이 드러나던 그 물음, 어찌하여 많은 사람이 남부여대하여 남으로 내려가는 것인가? ‘그들이 가는 남쪽이 여기 북보다는 살기가 더 좋은’ 곳이 아닌가? 누구도 삼십팔도선 이남으로 내려갔고 아무 네 집도 식구들대로 배를 타고 ‘이남’으로 내려갔다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천연덕스럽게 물으면, 누나의 대담은 단호했다. 아무리 그래도 ‘없는 사람이 더 많지, 있는 사람이 더 많겠느냐?’는 것이었다. 곧, 전체 ‘인민’의 절대다수가 못사는 곳, 그 사람들을 위하는 곳(나라)이 바로 네가 가야 할 곳이 아닌가, 라는 한마디로 마무리하고 얘기는 더 진전되질 않던, 그런 토론을 생각하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흥분이 계속됐다. 말하자면 ‘이남’에도 없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우리가 ‘해방전쟁’을 치르는데 더없이 커다란 방패일 수밖에 없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라고, 은연중 내게 알려주고 그 절대다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하는 곳이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백 마디의 웅변이 필요 없는, 평범한 한 처녀의 직관적 세태 통달의 짧은 한마디였다. 이로써 내게는 누나가 이미 전쟁을 예측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한다. 군사훈련, 교통호, 군용열차,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다.
밤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제 세상을 만난 개구리울음과 수없이 많은 하늘의 별을 세며 깊어만 갔다. 다만, 여느 때와 달리 집집의 등불이 꺼지지 않고 그림자가 끊임없이 얼른거렸다.
매일 수업은 하는 둥 마는 둥 어수선했다. 아침마다 어제의 지원‘맹원’이 무사히(?) ‘인민군’ 입대 여부를 알아보는 게 숨은 관심거리였다. 우리 1학년생은 느긋하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장담할 수가 없다. 오늘도 ‘민청 회의’에서 몇 명이 지원했다.
우리 반은 빈 책상은 아직 없다. 그러나 고학년은 빈 책상이 부지기수라는 소식도 들린다. 이렇게 몇몇은 소위‘남조선해방’의 열정이 충천했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