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외통궤적 2008. 7. 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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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은 얼마 전까지  얼룩져 있었다. 노랗게 몸살을 앓는 논배미, 이제는 살았다싶어서 잎 끝을 빳빳이 들어 사방을 둘러보는 논배미, 아예 일찌감치 뿌리를 내려서 짙푸른 논배미들이 깔려서 보는 내가 어지러웠다.

 

이 무렵의 들판은 모심은 차례를 알려 주듯이 연한 녹색과 진한 녹색의 커다란 조각 보를 펼쳐놓은 것 같았는데 우리들이 ‘군사동원부’로 들락거리면서도 보지 못했던 그 사이에 몽땅 땅내를 맡고 뿌리를 내려서 진한 녹색으로 바뀌어버렸다.

 

들판은 진녹색의 융단을 깐 듯이 고르고 판판하여 끝이 보이질 않는다. 커다란 책 보따리를 어깨에 바꾸어 메면서 잠시 뒤돌아보게 된다. 학교는 보이지 않는데, 촘촘하게 잇대어 있는 농가의 지붕위로 교정 언저리의 키 큰 벚나무의 가지 끝이 삐죽이 올라와서 반짝인다. 나를 마지막으로 배웅을 하는 것 같았다. 멀리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긴 열차가 남쪽으로 숨 막히게 내려간다.

 

‘고저’ 역에도 서지 않고 지나치는 것으로 보아 군용 열차인 것이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객차는 언제 올지 아는 이가 없다. 역무원도 모른단다.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다. 돌아갈 수도 없어 마냥 서성거린다. 대합실의 벽 밑에 놓인 나무의자는 벌써 길게 앉은 객들의 양발이 삐죽이 시멘트 바닥위로 나와 있고, 더러는 아예 의자를 구둘 목으로 하여 발을 꼬고 한 팔로 눈을 가리고 코를 골고 있다.

 

벽에 걸린 커다란 시계는 까맣고 동그란 테에 하얀 글자판 위의 새까만 바늘이 양팔을 뻗어서 한 일자를 그리고 있었다. 벌써 여섯 시간이나 지났다. 개찰은 시계바늘이 기억 자가 된 아홉시 반이나 돼서야 시작됐다. 그나마 홈에 나갈 수 있으니 기차는 탈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홈에서도 지루한 시간을 또 보냈다. 그 사이에 몇 대의 기차가 지났다. 그 기차엔 수많은 군인들이 가득 가득 실려 있었고 어떤 칸에는 간호장교인 듯, 여군들이 군가를 부르면서 우리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여자들이다.

 

 

여자의 몸으로, 말대로 조국을 해방(?) 시키러 간다며 그 열의가 기차화통에서 뿜어대는 연기만큼이나 하늘로 뿜어 올라가는 것 같았다.  기차가 구내를 빠져나가는 사이 그 여군들은 학생복을 입은 우리를 보자 더욱 크게 손을 저었다. 조소의 몸짓인지 격려의 몸짓인지 어리둥절했다. 아니다. 그 순간만큼은 부럽기도 했다. 나를 다시 내려다본다. 그러나 나는  불합격한 결격(缺格)자다. 기차의 꽁지를 한참동안이나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여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남자임을 무엇으로 나타낼까.

 

이후 나는 아버지를 돕는 일과 여군들의 조소와 호소가 범벅되어서 나를 흥분과 좌절과 안도의 굴레를 번갈아 돌리면서 소용돌이치게 했다. 그 때마다 내 가슴에 일렁이는 파도는 백 척을 내리 꽂혔다가 솟아오르는 용소(龍沼)의 물결과 같았다. 그러면서도 지난 일을 뒤돌아보아, 논두렁 가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토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엇갈리곤 했다.

 

상념에 찬 머리를 흔들어 털어 낸다. 기차는 ‘염성’역에 당도했다. 드문드문 가로등만이 여전하다.

 

한밤, 작은댁에서 제사지내고 돌아오던 새벽길이 떠올랐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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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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