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날

외통궤적 2008. 7. 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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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0.010411 운명의 날

왼손 장지 손가락을 오른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심장의 피가 온통 장지 손가락에만 쏟아붓는 듯 손끝이 방망이질한다. 아리고 쓰리다 못해 머리까지 울렁인다. 그러나 집안에는 내 손가락을 어루만져 줄만 한 여유,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

연로하신 할머니와 중병을 앓고 계신 아버지께서 들일을 하고 계시지 않는가. 아프다는 표정은 엄살에 불과하고 사치스럽다. 손가락쯤이야! 엄살을 호소해 보아야 반응은 들어보나 마나 한 것, 스스로 판단으로 귀결될 터니 이럴 때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척하고 있다가 슬그머니 내가 알아볼 일이다.

어두운 불 밑이라서 그런지 아픈 손가락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여느 손가락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도 견딜 수 없도록 아프고 쓰리다. 웬만하면 견디는 내 성미인데도 참아내질 못하고, 저녁 내내 밖에 나갔다가 방안에 들어오곤 했다. 견디다 못해서 이번에는 아픈 손가락을 화롯불에 굽듯이 쪼이면 그 순간은 조금 시원한 것 같다가도 잠시 후 다시 들쑤시기 시작한다. 다시 밖으로 뛰어나갔다.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아도 통증은 여전하다. 다시 이번에는 대야를 들고 우물가로 가 두레박질을 한다.

우물 속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절룩거린다. 길고 짧은 내 팔놀림을 우물물은 제대로 세어 들려줄 뿐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가 길게 이어지다 짧게 끊겼다 한다. 모두 길고 짧게 깊고 얕게 높고 낮게 내 손가락의 맥박과 조화를 이루는 듯했다.

대야에 쏟아붓고 손가락을 담그면 잠시 시원하다가도 어느덧 물속에서도 손가락에 불이 붙었는지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홀로 밤새도록, 잠도 자지 못하고 이렇게 반복하다가 새벽녘에야 조금 누그러져서 눈을 붙였다. 신경이 다른 데로 쏠렸는지, 손가락이 벌겋게 번질거리면서 부어있는 걸로 보아서는 한고비를 넘긴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랬는지 사르르 잠이 들었다.

‘생 손가락’ 아픔을 말로만 들었지 내가 생으로 손가락이 곪도록 있었으니 말 그대로 염통 곪는 줄 몰라도 손톱 곪는 줄은 안다는 속담을 에누리 없이 체험한다.

이런 고통을 더 견딜 수 없어서 오늘은 동네 의원이라도 가서 치료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느긋하게, 홀로 남아서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홉 시를 넘기지 않았다.

의원에게 외상치료라도 하려고 막 옷을 입고 나서려는데 이게 웬! 나는 소스라치도록 놀랐다.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다.

‘선생님 어떻게 우리 집을 다!’

다급히 묻는 내 말에 선생님은 전형적인 함경도 사투리로

‘젠진 젠진 물어서 왔지 아입네?’

우리 집을 어떻게 아시고 사십 리 먼 길을, 기차 시간도 아닌데 찾아오셨을까? 새벽길을 떠나서 걸어오셨나 보다.

‘임정환’이라고 2반 아이가 여기 어드매 있지비?’

‘예 바로 앞 집입니다.’

서슴없이 대답하고는

‘웬일이십니까?’

고 되물었을 때 선생님은

‘민청 회를 오늘 여는데 학생을 연락할 길이 없어서 선생님들이 분담해서 다닌다.’

는 얘기를 해주시고는 두 마디의 물음도 물을 수 없도록 손을 내저으시며

‘임정환’이를 데려오라고 하신다. 단숨에 달려갔는데 ‘임정환’이 어머니께서는 ‘정환’이가 밭에 갔다고 말씀하시기에 돌아와 그대로 아뢰니, 선생님은 밭이 어딘지 밭에 가서 데려오라고 하시는데,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할 것인가! 죽는시늉도 해야 할 사제의 사이, 우리 반 담임인데, 어떻게 토를 다나?!

손가락 아픈 것은 멀리 가버렸다. 선생님은 아침도 굶고 계시지만 나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다. 홀로 ‘정환’이네 밭으로 내려갔다. 약 1 KM 가량 되는 거리다. ‘정환’이는 원두막에 홀로 앉아서 느긋하게 책을 펴놓고 있었다.



원두막을 올려보며 자초지종을 말하니 ‘정환’이가 말한다.

‘야! 나를 못 만났다고 하렴.’

무슨 의미인가? 모든 정황으로 보아 ‘정환’이를 내가 데리고 갈 수 없는 것을 번개같이 판단했다. 목을 매서 끌고 갈 수도 없는 일, 그렇다고 나도 그 자리에서 눌러앉거나 둘이 줄행랑을 치자고 제의할 수는 더욱 없는 것, 나는 갈등했다.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피한다면 나는 학교에는 갈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 앞날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또 만약 내가 되돌아가서 우리 담임선생님에게 ‘정한’이는 밭에 있는데 ‘민청회의’에 갈 뜻이 없다고 전한다면 담임선생은 다시 ‘정환’이가 있는 밭으로 나와 함께 나서게 될 것이다.

그때 ‘정환’이가 있으면 내가 ‘정환’이에게 원망을 들을 것이고 반대로 ‘정환’이가 다른 곳으로 몸을 감추고 없다면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을 것이며 그 책임도 내가 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선생님과 함께 행동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판단한 나는

‘알았다. 그렇게 하자.’

두 마디를 남기고 발길을 되돌렸다.

판단은 ‘정환’이를 못 본 것으로, 밭에는 없는 것으로 말씀드림으로써 절묘한 국면을 만들어서 일생의 후회와 자책을 스스로 차단했으니,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선생님은 숨 고를 새도 주질 않았다. 교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따라나섰다. 하지만 ‘민청회’ 라는 사실만 또렷이 일러주곤 한마디의 말씀도 없이 그 먼 길을, 칠월의 뙤약볕을 고스란히 쬐면서 걸어갔다.

집안 식구 누구에게라도, 무슨 이유로 어디를 가는지는 알리고 가야 하련만 선생님은 그럴 곁을 주지 않았다. 잠시 생각 끝에 나는 쾌히 따라나섰지만, 머리는 번개같이 돌았다.

만약 지금 따라나서서, 오늘의 ‘민청 회’에서도 ‘인민군’ 지원결의와 ‘군사 동원 부’로 직행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 체중은 ‘기준미달’이니 별문제 없이 먼젓번 학교에서의 ‘민청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되돌아올 테고, 내가 여기서 ‘민청 회’를 거부한다면 학교는 앞으로 포기해야 할 판이다.

사 십리 길을 밥을 굶어가며 다닐진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들이 속한 노동당에서 실적에 따른 응분 처분을 암시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로 인해서 연쇄적 반응이 내게 미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나서느냐 버티느냐 택일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어떻게 길을 나섭니까?’고 반문하면 선생님은

‘일없음 매’

간단한 대답이다. 하는 수 없이 학교길 초의 고모네 집에 들러서 점심값이라도 빌릴 양으로 궁색한 자기 보호책을 생각하며 따라나섰다.

이 순간이 일평생 내가 괴로워해야 하는 대목이다.

변명하려 해도 할 수 없고, 부복통곡(俯伏慟哭) 하려 해도 되지 않는다. 꿈속에서도 허우적거릴 뿐, 부모님께 대한 속죄도 할 수 없다. 부모님께서 자식 운명의 날에 동전 한 푼 못 건네주고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게 만든 내 오만한 행동에 가슴 저미는 평생의 고통을 안고 살 줄은 미처 몰랐다.

금수(禽獸)의 정(情)도 이보다는 나으리라는, 아무에게도 차마 내놓고 말할 수 없는, 부끄럽고 창피한 내 행동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죽을 때까지 달고 다니는 왼손 장지 손가락을 볼 때마다 이날의 기억이 생생하고, 부모님께 대한 이날의 내 죄를 가슴 치며 통탄할 줄이야 미처 몰랐다.

그때는 그저 담담히, ‘민청회의’ 결의로 군사동원부로 가더라도 전번같이 체중 50킬로그램 미달로 제외될 거다. 하니, 점심은 고모네 집에서 먹거나 아니면 돈을 빌려서 사 먹거나 할, 지극히 단순한 생각뿐이었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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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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