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생활

외통궤적 2008. 7. 9.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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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팔선은 터졌다. 전쟁, 할머니의 말씀을 빌면 난리가 난 것이다. 할머니는 옛날 분이라서 그런지, 늘 난리에 대비하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피난의 길을 잘 아셨다. 난리를 겪지 않은 젊은이들을 몸소 이끄시어 화를 예방하는 경험을 터득하게 하셨다. 불순한 일기를 예감한 미물들의 움직임을 예증하시면서 사람도 미련을 피우지 않는다면 당연히 화를 면한다는 지론을 갖고 계시는 할머니다.

 

 

난리가 아니라면 할머니는 시원한 집에서 한가히 닭 모이나 주시고 계시련만 이즈음은 아침을 일찍 해 잡수시고 ‘동자원’ 앞들에 가시어서 소일하시면서 그곳에서 손자들을 돌보시고 남새도 가꾸신다. 자연히 우리 집은 비워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집 뿐이 아니라 숫제 동네 전체가 비어있다.

 

농번기 시골에는 이웃과의 왕래조차 잔칫집이나 동네의 모임이 있을 때라야만 있다. 이런 모임에서 소문이 퍼지게 되는데, 집집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어떻게 알아서 동네를 비우는지 그 것이 오히려 기막히게 이상하다.

 

공식적인 소식은 ‘인민위원회’의 각급 기관을 통해서 일방하달로 전해 오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만, 그밖 매사는 집안 중심으로 대소사를 의논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난리 통에는 집안과의 내통조차도 자제하는, 철저한 비밀주의가 의문이다. 이른바 정중동(靜中動)이던가.

 

 

마을은 개 한 마리 없는, 정적이 감도는 마을이 됐다. 그러나 저녁만 되면 그래도 활기를 되찾는다. 개짓는 소리와 꿀꿀거리는 돼지, 아기 우는소리 개구쟁이 부르는 소리가 섞여서 살아있는 마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저녁무렵이다.

 

 

소꿉친구 ‘이 재덕’이가 찾아왔다. 멍석을 깔고 둘러앉아서 저녁상을 막 치우려는 때, 깍듯이 인사하면서 나타나는 그의 거동이 조금은 수상 적었다. 어디서 망이라도 보다가 들어 닥친 것처럼,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로 내게 무엇인가를 주려고 흰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소집통지를 전해주려는 것으로 감지하고 말허리를 잘라서 내가 말했다.

 

‘어! 우리는 학교에서 소집돼서 가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그렇게 ’위원장‘에게 말씀드리도록 해’ 하니 그도 동원체제의 내막을 잘 모르는 ‘리 이민위원회’의 직원인지라  주춤거리다가 다음 볼일이 있다며 촘촘히 사라졌다.

 

그때에 조금이라도 내 언행이 당당하지 못했으면 그는 내게 소집통지서를 발부하고 나는 그 종이쪽지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단호한 내 말에 그는 기가 죽어서 돌아가긴 했어도 내 기분은 나를 추적하는 감시망에 포착되어서, 탐조등에 잡힌 비행기마냥 꼼짝 할 수 없는 몸이 된 듯 몹시 불쾌하면서도 학교라는 울타리를 믿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이 마음은 이중적 심리도 작용했는지 모른다. 학교에서 ‘민청’ 회의 끝에 ‘군사 동원 부’로 갔을 때에 체중미달의 전례가 있어서 그랬고 개인적 행동보다는 단체적 행동이 조금이라도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학교에 소속됨을 주장했던 것이리라.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내 세우는 절박한 장면이었다. 방학이 돼서 집에 있을 것이라며, 누군가 나를 일러바쳤는지도 모른다. 마음은 점점 들판으로 향했다. 방학 동안에 언제 누가 나를 대동하려 '인민위원회' 간부나 '보안서' 직원을 앞세워서 들이닥칠지 모르는, 나날을 초조하게 보내야했다.

 

식구들은 내 얼굴만 바라보고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난리를 겪는 할머니의 눈은 어느새 겹겹의 줄음을 더하며 그 줄음을 타고 흐르는 샘 같은 뜨거운 물기를 느꼈을 것이다. 이윽고 할머니는 소매의 명주수건을 꺼내는가싶더니 어느새 양 눈가를 여러 번 되 찍고 계셨다.

 

 

이 일이 있은 후 내 아침거동은 더욱 빨라졌고 저녁 귀가는 되도록 늦게 되는, 이상 생활의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한풀이라도 하듯이 들 사나이가 돼가고 있었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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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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