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동원 부’의 뒷마당은 푸르고 붉은색 복장의 무장한 군인들이 우글거리는 군영이었다. 일단 인계된 인원은 자유행동이 금지되었다. 어느새 선생님은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 버렸다.
차례를 기다리는 긴 시간 뒷마당 땅바닥에 앉아서 내리쬐는 뙤약볕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다. 어디서나 설치고 날뛰는 사람은 있게 마련, 여전히 앞에서 열변을 토하며 ‘남조선해방’을 외치고 있다. 모름지기 이들은 일련의 행사가 끝나면, 다음날의 이 자리에서 같은 방법으로 외치고 앞장섰다가 슬그머니 빠져서 또 다음날로 되풀이할 것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그럴성싶다. 마치 선생님들이 앞장서서 군대에 지원하여 학생들이 따라나서게 하고 슬그머니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는 방법이 아닌지, 그 자리에 계속 있어 보지 않은 이상은 알 길이 없는 것이지만,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행적을 보아온 나로서는, 미루어 짐작할 만도 하다.
희망은 아직 있다. 신체검사의 내 차례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그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 ‘민청 회의’ 때는 오십 킬로그램 이상이 되어야 합격 되었기 때문이다.
태양 열기와 함께 북적거리든 징집 열기가 누그러지고, 마당에 그늘이 질 무렵 호출되어서 들어갔다. 그새 많은 학생이 군관에게 인솔되어서 기차역 쪽으로 행렬을 지어갔다. 신체검사는 인적 사항을 파악하는 데 대부분 시간을 보내고 정작 신체검사란 키와 몸무게를 재는 것뿐이다.
내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합격(?)이다.
일 미터 육십 센티의 키에 사십칠 킬로그램의 몸무게란 한낱 기록을 위한 계측에 지나지 않는 검사 순서일 뿐, 이미 합격 불합격 기준으로써의 신체검사 기준과는 상관없어졌다. 일반인이고 학생이고 되돌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잔챙이 고기가 빠지는 투망 그물은 벌써 치우고, 멸치 그물 같은 촘촘한 저인망 그물로 훑는다.
어둑어둑한 뒷마당에 주먹밥이 배급됐다. 오늘의 저인망 멸치잡이는 끝을 맺었다.
보름달이 해와 바뀌어서 서늘한 빛을 내리 드리우고 있다. 달은 주먹밥을 먹는 우리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잠시 구름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이제 내 행로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의 일원으로써, 마치 쇠똥구리가 뭉치려는, 아직은 흩어진 상태 쇠똥의 몸이 되고 말았다. 쇠똥구리는 흩어지려는 쇠똥을 뭉치려고 네발과 역류하는 피를 무릅쓰고 단단히 무장하여 굴릴 것이다. 뭉쳐서, 한 귀퉁이도 허물어지지 않고 모나지 않게 굴려 갈 것이다.
‘고저’역에 벗어놓은 빈 화물차는 ‘대가리’가 없어서 움직이질 못하고 새까만 제 몸에다가 ‘쇠똥구리’가 굴려다 놓은 까맣게 옷 입은 쇠똥들을 꾸역꾸역 집어넣어 화차와 학생은 하나로 범벅되어 새까만 석탄 차가 되어버렸다.
전송하는 이도 없고 울고, 부는 낭만(?)도 없다. 화차 안은 감옥 그것이었다. 얼마 전, 의젓이 ‘계급장’을 달고 ‘양양’행 남행열차를 타고 의기충천하든 여자 간호장교들과 비교되어서 몹시 서글펐다.
명색이 나라를 위해서 싸우러 간다는 젊은이를 이런 식으로 대접한다는 것인지, 그 상황에서는 그나마 걸어서 가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마땅할 것을 철없이 구는 것인지, 한없이 섭섭했다.
점점 집 생각이 머리를 조이고 있다. 그러나 체념하는 수밖엔 도리가 없다.
‘회의’를 한다는 꼬임에 빠져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정상적인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칠흑(漆黑) 같은 화물차의 맨바닥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나.
학생들은 입을 벌릴 아무런 용기가 없었다.
벽에다 대고 말할 것인가? 허공에 대고 말할 것인가? 부질없는 짓인 줄 알고 있는 학생들은 이미 자기의 존재를 잊고 있다.
몇 시가 됐는지 모른다. 여기저기 길게 다리 뻗고 앉았더니 점점 흐트러져서, 이젠 아무렇게나 등을 바닥에 붙이고 누워서 곤히 잠들고 있다. 모두는 굴뚝 강아지가 되어 있었다.
몸이 흔들려 눈을 떴다. 차는 움직였다. 기차는 하행의 군수물자와 군인들을 실은 열차를 정거장마다 서서 비켜 보내면서 밤새도록 가다 서다 반복했다.
동쪽 하늘이 환하게 밝을 무렵에 기차는 오랫동안 멈추었고
또다시 뱀이 허물 벗듯 기다란 화차만 남기고, 칙칙거리든 화통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갈까마귀 떼처럼 새까맣게 밀려 나온 학생들 하차한 곳은 사과의 고장 ‘안변’ 읍이었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