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측통

외통궤적 2008. 7. 10. 09:07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2196.010416 궁하면 뚫린다

더러 아는 상급생이 있었지만 구차한 내 사정을 얘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사정을 내게 얘기할 텐데 그 사정을 들어주어야 하는 이중부담도 있으려니와 그렇게 해서 내게 득 될 일이란 눈곱만큼도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한 나머지 아예 접근조차 하지를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학생 신분으로써의 몸에 걸친 교복과 구두뿐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입은 옷과 구두를 다른 헌옷과 헌 신발로 바꾸고 웃돈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길뿐이다. 어머니의 정성이 담겨있고 아버지의 자식사랑이 배어있는 옷과 구두를 벗어주고 헌 옷과 함께 웃돈을 받는 것이다. 장사꾼은 만년필, 시계, 겉옷, 속옷 가릴 것 없이 돈 될 만한 것은 모아들이고 대신 늘어놓은 넝마 같은 것을 바꾸어 입혀 주면서 몇 푼의 웃돈을 얹어준다.

 

렇게 물물교환을 하는 길가의 노점에 들렀다. 고개를 돌려서 얼굴을 가리고 물었다. 옷과 구두를 드릴 테니 웃돈을 얼마나 줄 수 있느냐고. 얼굴은 홍당무가 돼 화끈거려서 더욱 바로 볼 수 가없었다. 교복은 값어치없고 구두는 약간의 돈을 쳐줄 수 있다는 것이지만 더 달랠 수도 없다. 주는 대로 받는 일방적인 거래이니 그들은 공짜로 가져가는 꼴이다. ‘몰라서 그렇지 입대하면 지금 입고 신은 것은 버리는 것’이라며 유혹한다. 딴은 맞는 말이다. 해서 그들은 배부른 장사다.

 

 

모름지기 세면도구와 엽서 몇 장하고 연필을 살만한 돈이었다. 받았다. 그리고 구두끈을 끄른다. 내 두 손은 떨렸고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양볼 위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손은 왜 이렇게 어눌한지? 양발을 구두밖에 빼내오는데 긴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아저씨의 고함치는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손을 움직일 때 내 손끝에는 아버지의 손길이 머물러있었다.  비로써 나는 한결 쉬이 몇 푼의 돈과 다 해진 운동화를 받아 쥘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어루만지며 말씀하셨다. ‘오냐 다시 지어주마.’ 이것은 내 환각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보았다. 구름은 여전히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얼굴은 온통 찐득거렸다.

 

 

검은 교복은 흙투성이로 범벅됐고 얻어 신은 운동화는 벗겨질 것같이 헐렁인다. 아래위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회색의 운동화는 나를 영락없는 거지꼴로 만들었다.

 

신으나 마나하고 닳아빠진 신바닥은 내 발바닥이 맨땅에 닿은 듯이 얇다. 뒤꿈치가 닳아서 발에 걸릴까말까 하고 흰색이 변하여 황 회색으로 된 해진 운동화다. 발에서 벗겨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돈을 받아든 나는  아저씨의 마음이 바로 변할 것 같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옆 가게에서 엽서 몇 장과 연필 칫솔 치약 수건 그리고 남은 돈 몇 푼을 안주머니에 깊숙하게 집어넣었다. 군것질은 내 생에 아예 들어보지 못한 낱말로 치부했으니 덤덤하다.

 

 

천애(天涯)고아가 되어 발가벗겨진 채 그대로 허허 벌판에 내 던져진 허전함을 또 한 번 느꼈다. 확성기에선 여전히 귀 따갑게 승전보를 울려준다.

 

 

엽서를 꺼내서 써 내려갔다. ‘부주전 상서/아버지 어머니 이제 저는 전선으로 가게 됩니다. 제대로 인사들이지 못하고 슬하를 떠났습니다. 불효 막급한 이 자식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꼭 살아서 기쁜 소식 가지고 돌아가 뵙겠습니다. 할머니,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누님, 열심히 사십시오. 동생들아, 꿋꿋하게 살도록 하여라. / 50년 7월 25일/불초소생 상윤 배상.’

 

 

이 편지, 이 엽서가 몇 날 몇 달이 걸리더라도 집에 들어만 간다면 나는 부모에 대한 죄 값을 만 분의 일이나마 갚을 것이지만 그 보장은 아무도 못한다. 죽고 사는 전쟁터에서 한낱 가랑잎 같은 엽서가 무슨 대수라서 우리 집에 보내진단 말인가? 추호의 기대도 할 수 없고 희망도 없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더 이상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작은 점 하나로 오그라들어 작아지면서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배달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어느새 우체통이 아버지의 자태로까지 변해 보였다.

 

눈을 감는다. 부디 집으로 들어가 다오. 이번 한 번만이라도 배달되어다오. /외통-



'외통궤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이다  (0) 2008.07.10
평양행열차  (0) 2008.07.10
탈출유혹  (0) 2008.07.09
사과밭  (0) 2008.07.09
화차1 속  (0) 2008.07.09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