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뒤돌아볼 마음을 접고, 앞으로 펼쳐질 두려움의 땅, 동경의 땅을 향해서 멀고도 높게 바라보아야 할 자신임을 자각하며 사과나무 그루에 기대어 다리를 뻗었다. 몇 번의 공습경보가 울렸지만 아무런 일은 없었다. 그새 해가 과수원집 지붕을 넘으면서부터 시원한 바람이 사과나무 사이를 훑고 지나간다.
햇볕을 쬐려고 웃자란 여린 풀포기가 키만 멀쑥하게 내 발밑에서 기죽어 있다. 여린 풀포기는 반짝이는 사과나무 잎과 대조되어 몹시 처량하게 보였다. 풀포기는 미구에 쓰러져서, 당당하게 버텨있는 사과나무의 밑 걸음이 될 것이다. 허리를 구부려서 가지런히 펴 주었으나 누구의 발길에 밟혔는지 바로 서질 못하고 힘없이 스러진다. 왠지 이 풀포기가 서글프다. 이 드넓은 과수원 안에는 사과나무 외에는 무엇이든 존재 이유가 없고 사과나무만이 햇빛과 영양을 공급받아 세세 장수 할 것이다.
그럼! 나 또한 사과나무의 영광을 쟁취하리라! 나는 벌떡 일어났다.
어둠이 깔릴 무렵에 행렬은 ‘안변’역으로 인도되고 또다시 기차를 타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운 좋게도 객차를 배당받았다. 삼등 객차엔 걸터앉을 의자의 바닥에만 겨우 천 쪼가리가 붙어있을 뿐 등받이는 나무로 된 채로 있어서 오히려 시원했다.
언제 떠날지, 어디로 갈지, 그냥 짐승 모양으로 실려 갈 뿐이지 안내해 주는 이도, 알려고 하는 학생도 없다. 경보가 울리면 모두 기차에서 내려 인근 숲속에 숨었다가 되돌아오는, 대피가 몇 번이고 되풀이된 후에 겨우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빛이 희미하게 하늘과 산을 가른다. ‘원산’ 쪽에서 하늘을 밝히는 섬광이 일더니 천둥소리가 요란히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원산 시가지를 폭격하는 것 같다. 아직 기차가 ‘함경선’을 기는지 ‘평원선’을 구르는지 모른다.
기차는 놀이차같이 가는 시간보다 공습을 피하느라 굴속에 숨어있는 시간이 더 길다. 협곡을 따라서 꾸불꾸불 힘겹게 올라가고 있다. 창밖은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차 안은 불빛 하나 없는 암흑이다. 입을 여는 애는 아무도 없다. 몸을 뒤로 기댔다. 덜커덕거리는 기차지만 모처럼 평안을 되찾아 사르르, 눈이 감긴다.
흔들거리든 마찰음이 멎고 떠들썩한 소리에 눈을 떴다. 얼마를 잤는지 모른다. 어느 산골 역에서 ‘화통’에 물을 받는가 보다. 고개를 내밀어서 창밖을 훑어보니 적막강산에 하늘이 천장처럼 좁게 매달려 있다.
우리가 깊은 골짝에 머물러 있나 보다. 또 잠들었다.
기차는 밤새도록 가는 시늉만 낼뿐 아직 함경남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밤새도록 간다고 간 곳이 ‘평원선’의 턱받이 ‘양덕’에 닿아 있었다.
옳다. 우리는 ‘평양’ 쪽으로 가는가 보다. 몇 시간을 머물면서 아침 주먹밥이 배급되었다. 기차는 이 객차를 더는 끌고 언덕을 올라갈 힘이 없는지, 굴지의 자랑거리 전기기관차를 대가리와 꼬리에다 붙이고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찬란한 아침 햇살이 절벽 위의 바위 끝에 비추더니 구부러진 노송을 깨워 우리를 반기게 했다. 첩첩산중의 농가가 이따금 한두 채 천천히 흘러간다. 주위에는 키를 넘는 ‘강냉이’가 긴 잎을 바람에 너울거리며 하얀 수염을 내민 옥수수자루를 감추었다 선보이며 뒤로 밀려간다.
기차는 해를 이고 해와 함께 진종일 서쪽으로만 움직였다. 굴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지옥 그것이다. 수십 차례의 지옥 나들이를 하면서 평양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잠시 수학여행이랄 환상에 젖었다. 지도상으론 멀지 않은 ‘평양’이지만 정작 처음 집을 떠나 움직이는 내게는 엄청나게 멀고 먼 지루한 여행이었다. ‘안변’을 출발하여서 밤과 낮을 다 털어서 하루 만에야 겨우 ‘동평양’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간간이 불빛이 새어 나오는 죽은 도시였다.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모든 게 내 의지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이끌리는 유성처럼 흐를 뿐이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