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식량

외통궤적 2008. 7. 12.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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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땅을 밟은 지 한 달이 지났다. 간간이 비 오는 날이 며칠 있었지만 훈련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젖고 마르고 또 젖고 마르기를 반복하면서도 훈련은 계속 되었으니까! 천후(天候)의 호악(好惡)이 일정의 변경이나 순연(順延)의 이유로 되지는 않았다.

 

 

소모품으로 내 몰리는 긴박한 상황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 수야 없지만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만은 똑똑히 알게 된 것은 마지막 날에 있은 일장(一場)의 훈시가 이를 극명(克明)히 말해주고 있었다.

 

지급되는 무기는 바늘하나 없다. 해방(?)지역에 ‘가서 노획한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허니 맨손으로 전선에 내몰리는 우리는 도살장으로 향하는 금수와 다름 아니다. ‘전쟁은 곧 끝’나고, 주둔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내무성소속의 군’이라는 말을 억지로 믿어서 위안을 받고, 더하여 요행을 빌어볼 뿐이다. 지급되는 소지품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가루치약과 칫솔이 챙길 것의 전부여서 오히려 홀가분하다.

 

행동에는 거칠 것이 없긴 한데, 싸우러간다는 군인이 하다못해 칼자루라도 하나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빈손으로 적(?)진에 나간대서야, 웬일인지 굴레 벗은 말 같아서 우선 내가 보기에도 민망하고 허전하다. 쌀자루와 미숫가루자루 두 개가 어제 지급 받은 '바랑'에 가득히 채워졌다. 이 바랑이 전장에 나가는 병사무장(武裝)의 전부다.

 

산중턱에서 진종일을 잠으로 채우도록 하지만 시시로 울어대는 공습경보는 눈 붙일 틈조차 주지 않는다.

 

 

바다가 없는 고장,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과 들과 하늘뿐인 낯설은 고장이었지만 나는 잘 어울렸다. 닥치지 않은 불확실한 앞날에 그래도 나만은 살아 남을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어느새 한 달을 훌쩍 넘겼다.

 

그동안에 훈련도 몸에 배고 시름도 잊고 잘 배겨냈다. 다가올 앞일, 내일을 걱정하며 하늘을 또 올려다본다. 나도 모르게 길들여진 버릇, 길이 막히거나 생각이 막힐 때 하늘을 보는 습관이 또 은연중에 나타났다.

 

 

창파가 지평을 아득히 끌고 가는 고향, 흐린 날은 바다가 울고 갠 날은 하얀 돛배가 손짓하는 고향, 완벽히 갖추어진 참다운 살 곳, 내 고향을 잠시 그려본다. ‘황주’의 산바람을 폐부가 터지도록 깊이 들이켠 다음 산을 헐고 들을 가로지르고 준령을 넘어서 아늑히 가라앉은 고향집까지 불어넣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워있는 내 머리 위에서 가지 채 흔들리는 떡갈나무를 내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다시 눈을 감고 아버지께 빌고 어머니께 매달렸다. ‘제가 원해서 가는 길은 아니지만 이 길만이 우리의 살길이 아닙니까?‘ 나는 몹시 외로웠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둘이 나란히 걸을 수도 없는 산길은 험하고 가파르다. 이 길은 공습을 피하며 남으로 내려가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질러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아무튼 행보는 가벼웠다. 아무도 대오를 이탈할 마음은 없다.

 

 

이 길이 영광의 길일지도 모른다. 두벌누에가 뽕잎 갉아먹듯이, 비 오는 소리같이, 고요한 산길을 훗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발자국만 남기고 걸어간다. 너와 내가 따로 없이 앞사람을 놓칠까봐 열심히 따라 붙인다. 무리에서 이탈하면 죽을 것만 같은 두려움조차 들었다.

 

 

남으로의 한밤 잠행이다. 남쪽이라는 짐작일 뿐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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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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