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걸었다.
무의식에서나마 생존 본능이 강하게 작용했던지, 허약한 신체조건에도 밤에 산을 넘는 것쯤은 문제가 되질 않았다.
‘사리원’을 거쳐서 가면 평지로 갈 텐데 굳이 험악한 산길로 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으리라. 상당한 거리를 단축하도록 이미 도상(圖上)으로 정했고 아침 급식 지점까지 이끌고 가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밤중을 산으로만 걸으니, 날이 새도록 걸어봐야 제자리에 올 수도 있을 것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설혹 그렇다고 치더라도 훈련의 목적으로 호도(糊塗)한다면 그만인 것을.
부질없는 생각이다.
아는 체하는 친구가 나타나서 인솔 장교에게 물으면 그들도 내일 새벽까지 닿아야 할 곳까지만 알뿐이라는, 그들도 하루살이 군관이다.
이들 군관은 한 달간, 우리와 같은 기간에 별도로 훈련받은 ‘학교 선배’들이다. ‘평양 제일 중학교’에서부터 분리 인솔해 간 스무 살 이상짜리 학생이다. 그러니까 나이가 별을 달아준 꼴이다.
마땅하리라. 소년에게 군관으로서의 지휘 책임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력 재원이 부족하여 비린내 나는 소년을 신체 조건하고는 상관없이 싹 쓸어서 몰고 가는 판국인데, 따질 일은 쌀눈 겨만큼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다. 지금 우리는 맨손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피 끓는 ‘역군의 용사’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학업을 포기하고 부모를 설득했으며 고향을 등지고 ‘조국 전선’에 ‘일로매진’하는 ‘해방군’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거늘, 어림도 없는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이미 집을 떠난 순간부터 너는 어떤 형태로든 ‘남조선 해방’을 위해서 산화(散華)해야 한다는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냐?
자문자답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돌에 체고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면서도 오뚝이같이 일어나 걸었다.
뜬눈으로 미명(未明)을 맞는 때, 어느 한길 옆의 넓은 개울가 언저리에서 행군이 멈추어졌고 개울을 건너서 야산으로 올라가도록 내몰렸다.
벌써 비행기 나는 소리는 귓구멍을 찌르고 지나간다. 갓 나온 인솔 군관들, 아니 상급생들은 그들 권총을 신호탄으로 하여 개울물을 건너도록 독려(督勵)했다. 건너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일행 하급생을 내몰았다. 물은 정강이를 넘었다. 성에 차지 않는 행동에 초조해진 그들은 권총을 마구 쏘아대면서 개울물을 건너도록 재촉했다. 총소리는 요란하게 골짝을 울려댄다.
결국 물에 빠져서 건너편 산으로 올라가는데, 마치 은어잡이 몰이에서 마지막 물막이 돌담에 몰렸을 때의 은어가 자갈 돌담을 튀어 넘어 올라가듯이, 모두 퍼덕거리며 산으로 몰려 올라갔다.
그제야 총소리는 그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행기의 공습을 받기 시작한다. 굉음(轟音)과 함께 나는 기관총 소리는 공포의 벼락이다. 하늘을 향해서 총 한 방울 쏘지 못하는 썩은 군대인지, 한 알의 총알이라도 ‘인민’의 피와 땀이니 아껴서 안 쏘는지, 답답하고 무력감마저 든다.
아랫도리와 신발은 흠뻑 젖었으나 말린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다. 우선 밥을 먹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다음 행동 명령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움직이면 비행기에 노출될 터이니 죽은 듯이 엎드려 있거나 앉아있거나 아니면 누워 자거나 해야 할 텐데, 이 짓을 해가 질 때까지 해야 한다. 올빼미다.
잠을 자야 오늘 밤을 새워서 걸을 텐데, 요놈의 밥시간은 왜 그렇게도 잦은지? 모르겠다. 밥 먹으랴 공습 피하랴, 긴 여름 낮인데도 제대로 눈 붙이지 못한다. 어설프게 지내면서 군대라는 것이 이런 것인지 의문의 파도가 또 밀려오고 있다.
하룻밤에 산길을 백이십 리나 걸으면서 ‘신동’을 지나고 ‘송월’을 거쳐서 ‘서흥’에 와있었다.
고향 집은 점점 더 멀어져 간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