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외통궤적 2008. 7. 13.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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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10528 한강

밤이슬을 피하여 교실 바닥에서나마 새우잠을 잘 수 있다는 건 처마 밑에서 하룻밤의 은신을 꾀하는 거지가 집안으로 들이는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이상으로 반갑다. 그 실, 우리의 형편으론 진종일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돌아다니다가 어두움에 발이 묶여 발길을 돌려 어머니의 그림자 드린 봉당(封堂)을 들어서는 철부지의 하루가 되어, 더 절실했다.

밤이면 걷고 낮엔 등걸잠을 청하며 천 리 길을 왔다. 열흘 동안 쌓인 피로를 잊고 모처럼 하룻밤의 단잠을 잘 수가 있었다. 비록 제대로 갖춘 이부자리와 베개는 없어도, 노숙을 하룻밤 면한대서 우리의 살아가는 형국이 달라질 바 없을지라도, 지금 자는 이 바닥에 고향 산천의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을지라도, 지극히 초라한 한 인간이 깃들은 이곳은 태고의 조상이 토굴을 반기듯 온화하고 편안하여 아무도 외면할 수 없는 지고(至高)의 안식처가 되었다.

짬짬이 타 먹은 미숫가루는 먼 길 걷기에 얼마나 보탬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이미 바랑은 끈만 달려서 우리들의 등에서 들썩이고만 있다. ‘적수공권’으로, ‘끓는 피를 담보’하여 남으로 내려가는 ‘소년병’의 ‘녹색 군복’은 한 달 사이에 연한 황색으로 퇴색되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데다 햇볕조차 받지 못해 노랗게 뜬 얼굴과 이 퇴색된 군복이 한데 어우러져서 그대로 하나의 떡잎이 되어 머지않아서 녹아 없어질 것 같다.

온몸이 노랑 일색으로 변해서 더욱 여려 보인다. 나는 이런 나를 볼 수 없어서 그나마 위안이 된다.

하루 밤낮을 늘어지게 잤다. 한낮에 보이는 산기슭엔 하얀 돌집들이 푸른 숲속에서 얼굴을 가리고 내려 보고 있다. 인적은 없고 하늘의 비행기 소리만 요란하다.

새롭고 경이로운 세상을 보는 것만도 황홀한 ‘시골 소년’에게 이 하얀 건물은 소년의 심성을 외면하고 훗날에, 오늘을 증거(證據)할 수 있을까? 아니면 금남의 집 여학교에 중머리 되어 들어선 소년을 측은하게 여겨서 입을 채워 영구히 함구하려는가? 말없이 지켜보며, 요지부동이다.

꿰뚫어 보는 흰 돌집은 말한다. ‘오늘의 거기는 금녀의 집이니라.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금남의 집으로 되돌리리라!’ 하룻밤의 유숙으로 개인의 역사, 나라의 역사가 뒤바뀌는 많은 교훈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래서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하늘은 여전히 들끓는다. 워낙 대피에 능숙한 탓에 일순에 숨어 흩어지는 우리를 발견할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 하늘을 손으로 가리고 숨은 꼴이다. 그런대로 위기의 한낮을 탈 없이 보냈다.

땅거미 질 무렵, 이제까지 보지 못한 두 구멍 뚫린 과자(?)를 비상식량으로 바랑 가득히 채우고, 늘 그렇듯 밤 거동(擧動)이 시작되니 또 앞사람의 등만 보고 따르는 청맹과니 길을 떠났다.

넓은 길을 따라 얼마를 걸었을까? 당도한 곳은 넓디넓은 한강 한 나루터였다. ‘한강도하’ 작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곳에서도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이따금 하늘의 섬광에 두어 척의 나룻배가 몸을 드러내어 죽은 듯이 흘러간다. 배꼬리에 말뚝같이 서 있는 사공은 노를 놓치지 않는 것만 봐도 천성 물려받은 사공임을 짐작하게 했다.

일순에 지나간 섬광의 잔영(殘影)은 두 척의 배와 한강의 너비를, 일생을 통하여 머릿속에 새겼을 뿐, 기나긴 강과 멀고 먼 피안의 기슭을 다가갈 수 없을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지는 못했다. 이 강이 훗날 내가 넘을 수 없는 ‘철조망’으로 변했고 ‘분계선’으로 변하여 또 한 번의 섬광을 애타게 기다릴 줄을 미처 몰랐다.

우리에겐 아무런 구호 장비도 구급 대책도 없이 나룻배의 사공 손목에 목숨을 맡기고 유유히 흘러가는 것이다.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사공의 노 끝에 의해서 밀려가는 것이다.

만약 이곳에 폭탄이 투하되면서 상황이 바뀌면 몰살의 위험지수는 백이십을 넘으리라.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따져볼 겨를은 없다. 간두에 섰거나 외나무다리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며 천우(天佑)의 순간을 기다릴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 하나 주의나 예비 지식을 알려 주는 이는 없다. 순간마다 각자의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마포나루’는 숱한 민초(民草)의 애환이 어린, 숨 쉬는 나루였다. 오늘 밤도 쉼 없이 누군가의 야심에 찬 입김에 의해 물살이 일렁인다. 만, 뱃전을 치는 물소리에 오늘을 사는 또 다른 민초(民草)들만은 애달프게 숨죽여야 했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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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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