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행진은 싸우기 위한 군인의 행군이 아니라 피난 소동과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목적지까지 닿아야 하는 단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숨죽여 움직인다. 사람을 피하고, 밝은 대낮엔 폭격을 피하고, 소문이 두려워 바람을 벽치는 패잔병과도 같다.
우리 미래의 혼돈 씨앗은 이때부터 배태되고 있었다.
저항의 의지와 방어의 바탕이 솜털만큼도 없이 건드리면 흠집만 나는 무 토막들의 행진이다. 주위가 무서워서 구령할 수도 없으려니와 총도 쏠 수가 없다. 스스로 방어할 가시나 잎사귀도 없는 무 토막들이다. 한 방의 총에 모두가 죽은 듯이 엎드려 있어야만 하는 허깨비 군인이다. 선무(宣撫)와 평정을 위한 그 무슨 대책의 일환일 거라는 짐작일 뿐이다.
서울! 서울은 평온하다. 한 나라의 수도를 유린(蹂躪)하는 점령군의 사기와 패기 중천은 귀로 들었고 책으로 보았을 뿐이다. 해방자의 권위와 자긍심도, 어미의 가슴에 안기는 새끼에게 무조건적 믿음을 펼쳐 보이는 어미의 진실함도, 위엄을 잃은 비무장 군인으로서는 어느 쪽도 미칠 수가 없었다.
이 얼마나 슬프고 서글픈 일인지 천지신명이나 알까? 우리 누구나 이런 호사한 생각을 할 겨를은 없다. 어미와 형제 병아리 모두가 떠나버린 빈 들판에 홀로 쳐져 남아서 방향조차 잃고 총총거리는 노란 붐 병아리의 고독 같다. 갑자기 서글퍼졌다.
한강 기슭의 지평은 멀리 물러나서 하늘을 저만치 넓이고, 무수히 많은 별을 뿌려놓고 강 비늘을 반짝인다. 멀리 남산의 윤곽이 젖무덤처럼 하늘을 향해서 봉긋하다. 그 뒤로 산과 맞닿은 지평은 숨어버린 별들을 감싸고 이제 한강을 건너서 남행하려는 지상의 무광(無光) ‘양철별’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가슴에 담고 있다. ‘북악’의 봉우리는 말이 없다.
서울을 감싸 흘러 한(漢)강인가,
‘양철별’ 흘러 내서 한(恨)강이지.
은하수를 쏟아부어 한(漢)강인가,
‘양철별’ 빛바래서 한(恨)강이지.
서울의 젖줄 되어 한(漢)강인가,
중머리 젖 비려서 한(恨)강이지.
여름에 얼음 얼어 한(漢)강인가,
소스라쳐 오그려서 한(寒)강이지.
한량들 뱃놀이로 한(漢)강인가,
손 놓은 사공 보아 한(閑)강이지.
뗏목 띄워 노 저어 한(漢)강인가,
등골 써늘해 숨는 한(汗)강이지.
언제 떠날지 어디까지 가는지 알 바 없는 나, 별을 보고 하늘과 땅끝을 이어 내리면서 건너온 한강에 쏟아 내린 혼을 일깨웠다.
변함없이 이어질 나루 영등포, 남으로 내려가는 우리나라 서부의 한강 이남 요충답게 역엔 많은 화차와 객차가 반짝이는 레일 위에 올려져서 줄줄이 늘어서서 김을 뿜고 있다.
‘꼬리 자비’ 개미가 되어 삼등 객차에 오르니 갑자기 사람이 된 것 같다. 이상하게 어색했다. 이제 모든 게 나와 상관없는 운명적 이음새로 흘러갈 뿐이지, 내 의지로 내가 서두르고, 내가 해결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걸 이 쇳덩이에 맡기고 영원히 달리고 싶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 열차가 닿는 곳에 우리의 희망이 있고 나의 미래가 열리기를 바라고 있을 따름이다.
기적소리도 나지 않았다. 손전등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기차는 서서히 움직였다.
별들이 흐른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