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다가도 때로는 초조하게, 우리를 진종일 굴속에서 보내게 했든 열차는 어둠 속에서 다시 기적을 울리고 승차를 독려한다. 털고 일어서 어미 젖꼭지에 매달리는 강아지처럼 객차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젖떼기 까까머리들은 살든 죽든, 그래도 기차가 움직이니 환호한다.
이들에게 무장 시켰던들 굴속에서 진종일을 죽치고 앉아 있진 않았을 것이다. 생사의 의미는 이들에겐 한낱 사치에 불과한 것이다. 이미 죽음이 각오 되고, 때만을 기다리는 살아있는 주검임을 스스로 잘 안다. 그러나 한순간 모든 게 무너지고 어린애로 돌아가는, 미성숙의 유치함을 아직 우리는 자각할 수가 없다.
죽으면 부모를 볼 수 없다는 것,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이들이 머릿속에 팽만한 죽음의 가치 전부이다. 세상의 빛을 보게 하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가야 할 참된 길은 어디서 찾는가? 이것들은 죄다 나와 상관없는, 알 바 없는, 공허한 생각일 따름이다. 그런 생각조차도 미치지 못하는 젖떼기이다.
우리는 어쩌면 전쟁의 와중에도 전쟁의 당사자로 뒤섞여서 행동하면서도 그중에 살아남는 극소수의 선택된 아이들에 끼이게끔 짜여서 평안히 모시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알랴! 모든 건 균형이다. 아울러 모순(矛盾)이다. 이 균형과 모순을 반복하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실체이거늘, 나라고 해서 그 어느 한 귀퉁이에 붙어서 흘러갈 수 없다는 예외적 존재일 수는 없을진대 순리에 따라서, 그 파장에 따라 움직여 간다면, 몸부림쳐서 기어코 이탈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회기의 접점에 닿고 순리의 질서 속에 다시 회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안주하기엔 나는 너무나 어리고 미흡했다.
전쟁은 참혹한 것의 총칭일진대 두 달이 넘도록 그 참상을 체험하지 못한 나는 아직은 지극히 행운을 맞아 보호받는 아이이다.
하기야 부모와 작별 인사조차, 못하고 나온 나로서는 전쟁이 아니었던들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할 법한 일일까 마는, 그래도 죽고 죽이는, 파괴와 절규와 한탄의 회오리를 비껴서 이곳까지 용케 살아서 흘러왔으니 아직은 행운을 안고 있는 터다.
굴마다 방공호로 이용했고 강과 평야는 경주(競走)의 장으로 만들면서 달린 기차는 동틀 무렵에서야 그 소리를 낮췄다. 기차는 홈에 설치한 하얀 역 이름, 간판만을 남긴 채 송두리째 없어진 대전역에 도착했다.
앙, 화(殃禍)를 방불케 하는 재앙의 현장. 초토(焦土)화된 역 주변은 휘어지고 구부러진 레일이 흩어있을 뿐이다. 키를 넘는 웅덩이가 역 구내의 여기저기에 패였다. 아직 탄연(彈煙)이 감돈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을까?
시가지를 바라본다.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같이 폭격을 맞아 잔해만 앙상하다. 어느 것 하나 성한 것 없는 시가지는 전화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참담했든 나날을 침묵으로 말한다.
팔월의 녹음을 비웃듯 역과 시가지는 검고 그을고 타고 남은 재로 인하여 흑갈색과 회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시야를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반하게 무너져서 마치 파괴의 표본인 양, 그대로 그냥 모든 사람의 넋을 빨아들인다.
시가지 남쪽의 먼 끝에 깔아 내린 산자락에 내 눈이 미쳤을 때, 대전! 여기는 전장의 폐허를 알리는 전시장같이 느끼면서 차츰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옴을 절감했다.
이 모두를 눈에 들이는 데는 몇 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치는 파장의 결과를 각인하는데도 부싯돌 불꽃처럼 반짝 새겨졌다.
어디론가 부지런히 인도되어서 한참을 걸어갔다. 텅 빈 시가지의 구석구석에서 단말마의 소리가 뒤통수를 치고 손톱으로 벽을 긁으면서 전율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이를 갈고 몸서리치게 한다. 군데군데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른다. 역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한바탕 코를 스친다.
그래도 살아있는 나는 시장기가 전신에 흐른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