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주택

외통궤적 2008. 7. 1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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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3.010610 단독주택

우리는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온전한 주택을 배정받았다. 그동안 갖가지 풍물에 접했었는데 오늘 또 새로운 상황을 맞아서 어리둥절한 나.

붉은 벽돌로 나지막하게 지은 단층집, 붉고 윤기 흐르는 양기와로 얹힌 지붕이 평온하다. 방방이 벽장과 붙박이장이 미닫이에 숨어서 공간은 넓고, 쾌적한 거실과 더불어서 헐겁게 넉넉하다. 방과 마루가 모조리 일본식 ‘다다미’로 깔려있으니 필시 이 집은 왜정 때에 지은 집이련만 쓰임이 깎듯 하다. 정갈하게 잘 정돈돼 있다. 잘 다듬어진 정원수로 둘려진 나무 울과 사이사이에 심은 다년생 화초가 만개하여 주인 없는 집을 지키고 있다.

예까지 오는 동안 다중용 시설에서만 북적댔는데, 울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비롯한 몇은 아늑한 고향 품으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누군가가 모퉁이에서 나올 것만 같은 인기척마저 느껴진다.

환각이라도 좋다. 그립던 보금자리다.

아니다.

우리는 전장에 나와 있다. 비록 총칼은 없되 어깨에는 별 판을 달고 발바닥에는 좀 구멍이 구멍구멍 뚫리도록 신 한번 벗어보지 않은 군인(?)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즉각 이동하는 기동성을 생명으로 한 군인이다. 고무바닥에 천을 둘러친 운동화를 닮은 헝겊 군화이지만 벗어놓을 수가 없다. 깨끗하고 정갈한 이 집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아깝지만 하는 수 없다.

한결같이 신, 아니 군화를 신고 방방이 들어가 활개 치는 것이다. 이미 몇몇 부대가 거쳐 갔는지 모르는 일이다. 책들이 흩어져 있는 서재엔 누군가에 의해서 뒤진 자취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혹시, 우리 앞에 간 ‘양철별’들이 숨을 곳으로 파헤친 서재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가히 돈을 탐닉하는 좀도둑의 장롱 파헤치기도 아닌데, 이렇게 분탕(焚蕩)을 칠 수가 있단 말인가?

필시 알고 있는 사람의 소행이라 짐작이 된다. 생명을 담보로 하면서 무거운 책을 가져갈 ‘양철별’은 없다. 그들은 단지 ‘양어깨별’이 지식을 담은 천 권의 책보다 낫겠기에.

향긋한 잉크 냄새가 신선한 꽃향기와 더불어 서재로 된 방 안에 가득하다. 양장으로 된 두꺼운 책들은 법에 관한 것들이니 법조인의 집이거나 교수의 집임을 직감하게 한다. 수많은 책이 일본 책이라서, 아직은 범접하지 못한 영역의 전문 서적이라서, 이들 ‘양철별’의 빛으로는 읽어 내릴 수 없는 것을 감안(勘案)해 보면 아마도 집주인이 자기의 생업을 위해서, 또는 자기의 전공을 위해서 필수적 휴대 장본(藏本)을 가려내려고 황급히 뒤지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깨끗이 정돈된 주변을 보아서는 주인의 급박(急迫)상황이 읽히기도 한다.

전장에서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겨를이야 없다. 그러나 그 많은 장서를 두고 가는 집주인의 아픔은 먼 훗날까지 내 가슴에서 도려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살며시 책상 위에 흩어진 한 권의 책을 들었다. 양손에 올려진 책은 느껴보지 못한 중후한 무게를 손목에 실었고 새까맣고 선명하게 박힌 활자가 시각을 맑고 청아하게 하면서 끌어들였다.

마분지 이면에 모래알처럼 긁혀 인쇄된, 내가 보던 교과서와는 그 질감에서 엄청나게 달랐다. 나는 기술(記述)된 내용을 앎으로 인한 충격보다 책 질감의 차이로 압도당하고 말았다. ‘해방된 조국의 미래’가 요원한 듯했다.

이때까지 지식의 주림을 벗어보려고 몸부림쳤든 내게 내용이야 어쨌든 이 많은 책을 모조리 읽고 갈증을 풀고 떠나고 싶은, 작은 욕심이 잠깐 스쳤다.

하지만 그 집에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또한 밥이 날려 오고 끼니를 잇는 전투(?)는 종일 계속됐다. 날은 저무는데 잠자리를 마련할 사이도 없이 다시 어디론가 이동하는 걸식의 무리이다.

다시, 하늘의 별이 초롱 하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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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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