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2 열차

외통궤적 2008. 7. 1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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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10603 남행2 열차

객차의 앞뒤 여덟 바퀴가 레일의 이음새를 차례로 지나며 기차의 흐름을 소리로 마디지어 장단 맞추고, 끊임없이 이어내면서 쇳덩이 객차는 좌우로, 흔들린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소리와 흔들림은 비록 귀를 때리는 요란함과 어깨를 요동하는 흔들림이 있을지라도, 젖먹이 어릴 때 어머니 등에 업혀서 걸음걸음 흔들림과 발자국 자장가에 버금가는 안락함을 느낀다.

객차 안의 젖떼기 소년들은 어느새 하나둘 바퀴 장단에 맞추어 흔들리다가 잠들어 버린다.

오랜만의 휴식이다. 소속도 모르고 목적지도 모르면서도 불안하기는커녕 그저 평안히 각자의 몸을 내맡기고 있다. 제각기 꿈속의 고향길을 달려갈 것이다.

달가닥거리던 자장가가 멈추는가 싶더니 토닥거리는 손길과 발걸음 따른 흔들림도 함께 멈추었다. 꿈은 깨고 기차는 어느 역에서 멈추었다.

좌우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산이란 보이지 않고 막막한 들판만이 끝없이 펼쳐서 넓혀 간다.

초승달이 서쪽으로 기울어 멈추어선 몇 안 되는 별을 감싸고 있다. 정지된 별, 이 별들은 유난히 반짝이며 마지막 빛을 멀리 우리가 있는 이곳, 차창을 통해서 ‘양철별’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어두워야 하늘의 별이 빛나듯 차 안의 ‘양철별’도 어두워야 반짝인다. 밝아오는 대명천지엔 빛을 잃고 숨어버리는 별, 그리하여 죽은 별이 되어 사라지게 하는, 동이 틔기 시작한 것이다.

‘양철별’을 싣고 가는 쇠뭉치의 ‘앞 대가리’에도 낮엔 빛을 내지 못하는 붉은 쇠별을 달고 있는, 운명의 인조 별들의 집합이다.

하늘의 별을 닮고자 하는 지상의 별들이여 영원히 낮에는 빛을 보지 못하리라!

무엇 때문인지 잠시 멈추었든 기차가 밝아오는 빛에 쫓기듯 서둘러 용무를 마치고 달려 내려간다. 아마도 우리의 식사와 주간 피신처를 조정하는 것이리라.

기차는 숨을 곳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나직한 구릉을 끼고 계 딱지 같은 초가지붕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물안개 피는 앞 내의 버들치가 안개를 타고, 연기를 타고, 밝아오는 동녘 하늘로 날아오르듯, 싱그러운 새벽이 열리고 있다.

순식간에 뒤로 흘러가는 평화의 마을이다. 그러나 저 마을에도 죽을 자와 살 자가 공존하는 이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앞날을 점치기는 아직 이르다. 지금은 ‘해방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숨죽이며 관찰하고, 그래서 순종하고, 또한 기치를 들고 앞장서기 시늉하는 것만이 그들 자신을 보호하고 그들의 식구를 감싸고 그들의 이웃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평화로운 마을임에도 암운은 틀림없이 서려 있을 것이다.

기차는 미친 듯이 달리고 있다.

어느새 빨간 진흙이 산허리를 군데군데 흐르는 산골길을 지나면서 푸른 들판은 보이지 않는다. 이랑마다 구불구불 잎 넓은 담배밭이 이어지고, 황 록의 배색이 선명하여 우리가 탄 기차와 나란히 구부러져 휘어 흐른다.

해는 벌써 만상(萬象)에 그늘을 지우고 있으나 우리의 그늘진 얼굴엔 햇빛이 미치지 않는다. 허기가 창자를 죄이고 눈꺼풀을 드리우나 비상식량인 마른과자는 이미 동났다. 멈추지 않는 기차는 제동장치가 깡그리 고장인 듯, 모든 역을 무시하고 질주하다가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밝아와야 할 굴 밖은 진종일 기차 바퀴가 굴속의 레일에 녹아 붙었는지, 앞뒤의 굴 끝이 동전만 하게 틔어서 빛을 들이는 위치에 용케도 섰다. 이제 우리는 굴속에 갇혀서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고 안에서 그대로 허기를 견뎌야 하는 극기의 극치를 맛보아야 할 차례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야 함지 부대의 아침 겸 점심인 주먹밥이 굴속으로 들어왔다. 그새 무수히 많은 공습을 겪고 탄환의 빗발을 이겨야 했다. 죽음은 굴 밖에서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다. 굴 밖은 하루 내내 정찰기가 맴돌고 있다. 지옥의 굴 안은 죽음의 굴 밖보다 안전한 것인가? 가늠하기 어렵다. 그대로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초조와 긴장의 연속이다. 암흑의 굴속은 오히려 안식처이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특수한 실정이다.

굴 밖은 어떤 경우에도 탈출의 기회는 백출할 수 있으나 굴속의 피신은 이런 기회가 티끌만치도 없으니 어떤 상황에도 살아남기 어렵다. 우리는 이 쇳덩어리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기로 이미 점지된 것을 모르진 않지만, 도저히 눈을 감고 잠을 들일 수가 없다.

우리가 탄 기차를 지켜줄 굴지기는 없다. 만약 굴 양쪽에서 독가스라도 살포하는 때는 우리의 처지는 어찌 될 것인가? 이 열차에 무장군인이 있는지 없는지 아는 바 없다. 하지만 우리의 선험(先驗)으로 보아서는 굴을 지킬만한 무장은 없는 것이다. 해서 전전긍긍이다.

굴 벽에 기대고 목을 좌우로 돌려 새어드는 빛을 바라보며, 그대로 그 빛이 서광으로 이어지길 바라고 있을 뿐이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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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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