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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통궤적 2008. 7. 2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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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영아기 유아기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굳이 갈라서 본다면 젖먹이 영아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제 손아귀에 있고, 젖을 갓 뗀 유아기는 제가 혼자서만 몽땅 차지하고 놀 수 없는 것을 깨쳐서 손아귀를 폈다 오므렸다 하고, 유년기에 든 개구쟁이는 세상 모든 것이 제 차지가 못 되는 것이 아쉬워서 만져보고 찔러보고 깨뜨리며 손짓을 하고, 어지간히 세상물정을 알아 막 초등학교에 들라치면 많은 것을 친구와 더불어 갖게 되는 소년기의 공동생활을 체험하며 손은 거지반 펴서 자기를 절제하게 된다. 또 청 장년기는 부지런히 손을 놀리지만 세상 것의 극히 미미한 부분만 얻을 수 있고 나머지는 제 것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하면서 있는 것도 놓칠세라 부단히 손을 놀린다. 그러다가 노년기가 되면 손을 펴고 뒷짐지고, 아예 손 오므릴 엄두를 내질 않는다. 결국 인생은 나면서 오므려 쥔 주먹을 서서히 펴고 편 손바닥을 하늘에 보이는 과정인 것이다. 풍요로운 만큼 그 기간은 역비(逆比)로 짧다.

 

이렇듯 우리 삶의 실제는 성장과 행복이 뒤집혀서, 어릴수록 풍요로워 넉넉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궁핍하여 버둥거린다. 여기선 물량이나 질의 절대적 가치가 망라되지만 정작 풍요는 인식의 척도에 따라서 역으로 반영된다 보인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 양 주먹을 쥐었다가 손바닥을 펴고 들여다본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바른길인가? 곱씹어본다. 내 젖먹이 때나 철부지 때는 무지갯빛에 싸여서 생각조차 가물거리니 젖히고, 철나면서 어려운 집안의 장손으로써 체통을 못 지킨 것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스스로 버텨서 인동초가 된 오늘, 이곳에서조차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새로운 소년단가에 발맞추어 대로를 활개치며 과거를 묻어야만 하는지 자탄한다.

 

 

소년기에 들어서 유달리 많은 풍파를 겪었지만 이즈음 나이답지 않은 고뇌의 늪가에서 서성인다. 청 장 노년기는 경험치 못하니 그렇고, 이제 겨우 문밖출입이 가능하여 제집을 떠나 세상의 그림을 관상할 시기의 내게 세 나라, '일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포로 신분으로의'대한민국' 소년단원을 차례로 겪으니 새삼 겹쳐서 생각되는, 그것이 서글프다.

 

나는 이제부터 동래포로수용소의 소년단원으로써 새 환경에 적응하는 훈련에 들어가야 한다. 포로집단 중에 나이 가장 어린 축에 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년단에 가입함으로써 작업을 면할 수 있었기에 씁쓸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거꾸로 사는 세상, 세상을 보는 눈도 조금은 유치하게 되어서 차라리 그대로 넉넉하다.

 

소년, 이름 하여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미성숙의 대명사에 다름 아니다. 비록 옷의 앞가슴과 등과 정강이와 오금에 전범자의 낙인이 검은 페인트로 덕지덕지 찍혔을망정 목에는 단정하게 녹색스카프를 두르고 하늘을 양해서 소리높이 외친다.

 

‘형제간의 싸움을 없애버리고 평화로이 단란하여 동락하려면…’ 소년 군인이 소년포로가 되어서 소년단에 들어가 부르는 이 노랫말 마따나 형제간의 싸움은 없어야 하건만, 형제간 싸움에 나선 내가 생사여탈권을 쥔 유엔군에 의해서 살게 된 생명의 환희를 이렇게 노래 부른다.

 

 

총칼을 든 국방군 아저씨들이 길 양옆을 촘촘히 늘어서서 따라오며 말없이 먼지만 둘러쓰고 있다. 그들 나름의 의무를 다하며 어처구니없는 이 행각에 아연하지만, 우리가 유엔의 기치하에서 벌이는 짓이니 어찌 감당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의 야전구급훈련놀이를 총칼로 호위하는, 기상천외의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소년단놀이에 중무장전투호위병이 포진하여 우리'소년단'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이율배반이다. 그것은 청장년들이 전쟁놀이를 하는데 대응되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화의 선구적 상징의 보이스카우트세계 연맹의 한 끝을 붙잡고 있으니 이런 일을 어떻게 풀이해야 할지 기가 찬다.

 

 

겹쳐서, 붉은 기와 흰 기의 두 가지 수기를 양손에 들고 작열하는 팔월의 태양아래서 해양소년단 집단훈련을 하던 일제하의 소년,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하라며 구호(口號)대를 편성해 빨간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그들의 소년단가 ‘…소년단 만만세’가 오늘 내가 가는 보이스카우트노래의 꼬리에 이어 맴돌고 있다.

 

 

움킨 손을 겨우 조금 펴 보는 나이기에 가능하다. 아직 손이 펴지지 않아서, 손아귀에 많은 것을 움켜쥐고 있는 내게 풍요가 있음은 당연한 것인가? 나는 아직 손을 다 펴지 않아서 내 손아귀 속에 세상의 온갖 것이 담겨있다.

 

내 손이 부지런히 오그렸다 폈다 하게 되는 날, 나는 엄청난 박탈감을 느낄 것이고 그 기간은 지겹도록 긴 날이 될 것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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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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