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꽉 막힌 배 밑창에 실린 후부터는 애타는 마음은 쥐어짜는 듯 조이건만 끈질긴 생명력은 간이음식을 모조리 털어먹는 힘을 주었다. 더러는 멀미로 토하지만 난 그런대로 온전하게 버티고 있다.
부산에서 배를 탄 지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며칠이 되었는지도 깜깜 모르지만, 소용돌이 바닷길에 끝장도 있었든지, 마침내 우리에게도 햇빛이 찾아들었다.
배의 가슴팍이 터졌다.
개구멍에서 훑이듯 쫓겨나온 내 눈에 가득 차는 바위산, 모래밭 위에 떠다 놓은 민 바위가 시꺼멓게 버티고 있다. 이국의 풍광을 연상할 겨를 없이 섬뜩하다. 발자국이 없는 백사장, 언덕과 솔밭으로 뒤덮인 낮은 산들, 어딜 보아도 사람이 다닌 흔적이랄 수 있는 길은 없다. 길은커녕 발자국조차 없는 풀 섶과 야산, 필시 무인도에 온 것이다. 뒤돌아보았다. 바다를 통째로 가로막은 배, 옆구리의 하얀 글자가 백사장보다 더 희어서 내 눈에 뚜렷이 들어왔다. L.S.T, 무슨 뜻인지 모르지, 하지만 이 배가 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곳에다 우리를 부려놓았으며, 왜 군함과 멍텅구리 같은 배가 저기에 버티고 있는 것일까?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 마음조이다가 그만, 나락으로 떨어지며 전율한다.
우리를 이 산골짜기 어딘가에 몰아넣고, 나를 실었든 배를 호위하여 멀리 정박한 저 함정에서 불꽃을 튀길 것이 아닌가? 구원의 길을 봉쇄해서 아사시키지나 않을까? 비행기로 불을 내려 태워 버리지나 않을까? 끝없는 의문에 내 염통이 불붙어서 고동치고 허파의 풍구(風具)질이 거칠어져서 뿜어내는 입김이 드세다. 이 입김이 아무리 드세어도 검푸른 파도를 제압하고 버텨선 저 배를 밀어낼 수는 없다.
바닷바람은 코끝을 붉게 물들이며 볼을 엔다. 위축된 우리를 산송장으로 만들어 조인다. 모포를 머리부터 둘러쓰고 눈만 깜박이며 숨죽이고 있을 뿐이다. 몰아쉬는 숨결이 터지는 때, 시야를 가린 저 거대한 배도 움직일 것이다. 절망이다. 그나마 갓 솟은 태양이 햇살을 부어 눈꺼풀을 뚫고 실오리 같은 한 가닥 희망, 서광이 비친다. 햇볕을 쬐는 것, 이것은 삶의 실체다.
나란히 떠 있는 배에서 육중한 장비가 쏟아져 나오더니 백사장엔 순식간에 철판 길이 나며 쏟아진 장비가 이 길을 따라 골짝으로, 골짝으로 꼬리를 물고 들어간다.
황야엔 무거운 장비가 지나가면서 새 길이 그대로 만들어진다. 가는 데가 바로 길이다. 가히 전쟁에서 이길만한 힘 있는 군대다. 그런데 왜 우리를 귀향시킬 전승의 기틀을 잃고 이런 낙도에까지 밀려오는 것일까? 우리의 신상에 최후를 맺기 위해서 이 무인도를 택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다시 전선에 복귀한 듯이 살벌한 미군의 행동을 보면서 여전히 불안이 가시질 않는다. 바다를 뒤로하고 앞차를 따라 골짝으로 들어가는 죽음의 무리, 이마에 쏟아지는 아침 햇빛만 눈 부시다.
꽤 넓은 골짝에 층층이 이어댄 논 다락의 파란 보리가 갈색 들판에 겨울을 잊을 만큼 생기를 돋우건만 이 생명이 넘치는 들, 보리밭에 셀 수없이 많은 트럭이 물밀듯이 닥치니 보리밭은 기어이 뭉개질 판이다. 보리, 인간 생명에 버금인들 가랴! 골짝의 후미마다 초가집 잇댄 마을이 깔리고 실오리 같은 마을 길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서는 우리 땅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를 부린 바닷가는 거제도의 북부 중심으로 파도를 이길 힘없는 섬 주민들로부터 버림받은 곳, 천연 그대로 있는 이 섬의 파도 막이 땅이다. 이곳으로 죽은 생명이 거센 파도를 타고 밀려오고 있다.
이제 우리는 L.S.T의 간이음식이 아니라 제대로 익힌 음식을 축내기 위해서, 너무나 커서 움직이지 못하는 배(船)고 태고로부터 바다에 떠서 있는 거제도(巨濟島) 거함(巨艦)의 선복(船腹)에서 ‘인분(人糞) 공장’ 부품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날 하루의 햇빛에 감사한다. 그러면서 어두운 마음에 비칠 새로운 빛을 목 빠지게 기다릴 수밖에 없다.
거제도의 한복판 ‘고현리’ 골짝은 건설장비의 굉음으로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밀렸지만, 이 굉음 속에 묻힌 포로들의 한숨 소리는 가려들을 수가 없다./외통-